나의 일생 33
나는 한때 신문배달소년이었었다... (1)
또 5학년 때 일이다. 1988년에는 대한민국도 단군 이래 최대로 한반도 전역이 들썩거렸듯이, 돌아보면 나에게도 참으로 많은 일들이 생겼던 말 그대로 다사나단했던 한 해였나 보다. 한 6월쯤 되었던 걸로 기억이 난다. 학교 마치고 그 무렵의 제일 친한 단짝 OO욱이라는 친구와 단둘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내가 다른 친구와 싸우는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힘 없고 약한 내 편이 되어주던 고마운 친구 그 자체였다. 그 친구는 내 바로 뒤뒤엣번호 즉 나보다 키가 약 5센티미터 가량 더 큰, 그러니깐 국민학생치고는 제법 큰 편에 속하는 학생이었다. 그리고 나보다 약간 더 말랐지만 운동신경도 뛰어나고 근육도 꽤 있다보니, 3학년 때부터인가 학교 육상부에 들어가서 이제는 공부 대신 체육특기자의 길을 걷고 있었던 그러나 여느 운동부 친구들처럼 시시껄렁하지 않은 보기 드문 성실한 친구 중의 하나였다. 나 오늘 용돈 받았는데, 저기 멀리까지 팥빙수 먹으러 갈래? 안 비싼데 양 많은 집이라더라. 그 친구가 내게 넌지시 함께 동행하지 않을 것인지를 물어왔다. 물론이지. 내가 권할 정도라면 나쁘지는 않겠다. 한 15~20분은 족히 걸었을까 걸어서 가기에는 생각보다 아주 먼 거리였다. 황금빛 쬐그맣고 납작한 양푼 그릇에 맹물 얼음을 갈아다가 팥 딱 한 숟가락을 그 위에 얹어주는 게 그 한그릇에 100원어치 팥빙수의 전부였다. 무쇠라도 씹어먹을 왕성한 식욕의 국민학교 5학년 학생들 둘에게는 꼴랑 한 그릇씩의 현저히 부족하디 부족한 그 분량은 한숟가락꺼리도 안 되었다. 아쉬웠다. 하지만 이미 친구의 귀한 200원의 용돈은 저 멀리 소멸되고 난 이후였었음을... 게눈감추듯 순식간에 비워져버린 빈 팥빙수 그릇 두 개를 물끄러미 바라보면, 나와 그 친구는 나름 심도깊은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할 꺼냐. 계속 달리기 할 꺼야?친구는 시 대회뿐 아니라 도 대회에서도 입상해서 전국체전에도 나갈 준비를 하던 나름 잘 나가는 육상선수였다. 그래서 일찌감치 체육특기자로서 육상부가 있는 다른 지역으로 중학교 진학한다는 계획을 벌써부터 하고 있었다. 좋겠다. 너는 네가 잘 하는 게 있으니 계속 해서 열심히 해나가면 되잖아. 나는 특별히 잘 하는 것도 없고 공부만 잘 해가지고 뭘 해야 될 지 모르겠다.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 팥빙수 한 그릇 뚝딱했더니 살얼음처럼 술술 입 밖으로 나왔다. 나는 그 친구가 부러웠던 게다. 비록 육상부라서 다른 친구들이 콩나물 시루에서 자라나는 콩나물들마냥 교실에 들어앉아 수업하고 있는 동안... 뙤약볕에 온통 새까맣게 그을릴 정도로 연신 운동장을 뛰어다니기만 했던 그 친구였지만, 그래도 남들보다 특출나게 잘 하는 게 있다는 것은 그것도 눈에 잘 띄지 않는 "공부" 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달리기" 라는... 노력한 만큼 훈련하고 관심을 기울인만큼 대번에 눈에 확 드러나는 결과물이 있는 분야를 계속 해 나간다는 것은 어디 내놓아도 결코 꿀리지 않는 그 무언가였었다. 내심 그런 내 친구가 자랑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나 보다. 한번은 그 친구집에 놀러가서 밥도 얻어먹고 "영화 고스터 버스터즈" 도 비디오로 같이 보고 온 적이 있었다. 중산층에 남부럽지 않은 나름 유복한 집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공부 대신 운동을 택한 그 친구의 선택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집안 분위기여서 더 신기했던 거 같다. 우리집 같았으면 쉽지 않았을텐데...
갑자기 친구가 나더러 제안을 해 왔다. 혹시 신문배달해 볼 생각은 없니? 쌩뚱맞은 질문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긴 그 당시에 무슨 연유였는지, 자전거 타고 이른 아침에 조간신문 배달하는 것이 국민학교 고학년들 사이에 은근 유행처럼 돌았었다. 자전거 타는 게 좋아보인건지 아니면 신문배달하는 것이 멋있었는지 그 실체는 도저히 알 수가 없지만, 암튼 이미 학교에서도 새벽 같이 일어나서 신문을 돌린 다음에 등교하는 학생들도 몇몇 있다는 풍문도 솔솔 들려오기 시작했었다. 35년 전인 1988년 시세로 조간신문을 배달하면 한 달에 최대 10~13만원인가까지 받을 수 있다고 떠벌리던 얘기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내 친구는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도 기를 겸 집 근처를 뛰어다니면서 달리기 연습도 할 겸 괜찮은 방법인 거 같아서 신문을 돌려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 순간 아예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던 거 같다. 집에 아버지가 물려주신 두발 자전거 하나는 있으니, 그거 타고 신문배달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신문배달료 받아서 뭐하면 좋을까. 밤낮없이 맞벌이하시는 부모님께 생활비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겠다. 대충 이런 생각만 떠올랐던 거 같다. 그런데 매일 새벽 이른 시각에 일어나서 신문을 돌리고 학교에 간다면, 피곤해서 수업시간에 잠이나 자야하고 그러면 공부 못한다고 오히려 어머니한테 혼날텐데... 조간신문은 어림도 없겠다 싶었다. 친구 역시 아침에 일찍 운동장에 집합해서 달리기 연습을 시작해야 하는터라 조간신문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둘은 조간신문 대신 석간신문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그러고는 나는 어느새 그 친구와 함께 동네에서 가까운 어느 신문 지국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