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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생 32

오락실 집 막내아들 이야기 (4 ; 완결) 생일날...

by 특급썰렁이

드디어 생일날이었다. 그날 아침에야 어머니가 내게 알려주신 나의 생일파티는...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없었단다. 뭐지. 있지도 않은 생일파티에 친구는 왜 초대하라고 하신거지. 대신 매년 생일날 아침마다 그래왔듯이 아침밥상에는 미역국이 올라왔다. 그리고 가스렌지 위에 올려진 미역국 냄비를 발견하게 되었다. 아. 오늘부터 적어도 1주일 동안 내내 하루 세 끼 꼬박꼬박 어김없이 미역국만 주구장창 먹게 되겠구나. 첫 술부터 미역 비린내가 올라와서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큰누나도 작은누나도 이미 포기한 표정으로 무거운 밥숟가락을 힘겹게 연신 들었다 놨다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거 같았다. 어차피 생일파티라고 해봤자 기깔나게 멋드러진 케이크를 사다가 촛불이라도 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케이크 대신 초코파이라도 양껏 쌓아놓고 초라도 몇 개 꽂아주시면 좋으련만. 어머니는 애 셋이나 되는 집에서 뭐 일일히 자식 한 명 한 명 생일까지 챙길 필요 있냐는 분이셨다. 돈도 없고 먹고 살기에도 빠듯하게 매일매일 살아가다 보니, 자식들에 대한 애정도 관심도 감히 기울일 만한 여유가 사라진 듯 보였다. 그래서 나도... 어려서부터 일찌감치 그런 집안 사정을 눈치채고 진즉에 시근이 들어버린 애늙은이 같은 나도... 너무 빨리 철들었는지 아버지 어머니에게 절대 무리한 요구라고는 애시당초 꺼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갑자기 그 선택받은 친구한테 미안한 맘이 들기 시작했다. 그럼, 그 친구한테는 뭐라고 하죠? 기껏 생일파티 오라고 한참 전에 약속해 둔 건데... 어머니는 단 1초도 생각하지 않으시고 곧바로 대답하셨다. 그 친구 데리고 아버지 오락실에 갔다 와라. 아하, 이게 바로 어머니가 생각한 내 생일 파티구나. 갑자기 어깨가 으쓱 올라가기 시작했다. 맞다. 우리집이 바로 그 전자오락실이었지. 나는 그 집에서 하나뿐인 막내아들이고. 한껏 으스대는 마음을 부여잡고 학교로 신이 나서 뛰어갔다. 이 기쁜 소식을 빨리 그 친구에게 전해 줘야지. 아니나 다를까 그 친구는 나의 생일날이 몇 월 몇 일인지 기억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나와 마주치자마자 그 친구가 내게 다가왔다. 오늘이 네 생일이지? 오늘 생일 파티는 어디서 해? 당연히 우리집이지. 학교 마치는대로 우리집에 가면 돼. 나는 그리고 그 친구는 하루 빨리 그 날의 모든 수업들이 다 끝마쳐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생일 파티가 과연 어떤 식으로 전개될른지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채 그 친구는 마냥 기대하는 눈치였다. 학교를 마치고 나와 그 친구는 손을 잡고 교문을 나섰다. 그리고는 나의 발걸음이 곧장 아버지의 오락실이 있던 시내 방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 친구는 약간은 다급한 목소리로 황급히 내게 물어왔다. 너네 집은 반대 방향이잖아 왜 이쪽으로 가??? 나는 의기양양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일단 내 따라와 봐.

한참을 걸었을까, 학교로부터는 걸어서 제법 먼 거리에 위치해 있었던 아버지의 전자오락실 가게가 머지 않은 거 같았다. 국민학교 3학년 아이들 걸음걸이로도 30분은 족히 걸릴 만큼 먼 거리였다. 그 친구는 왜 내가 우리집이 아니고 시내로 자기를 끌고 나왔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눈치였다. 사실 그 친구는 나의 아버지가 전자오락실을 운영하고 계신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한참을 걷고 또 걸어간 끝에 이윽고 시내 한복판 아버지의 가게 앞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 친구는 내가 느닷없이 오락실 앞에 멈춰서자,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정면으로 빤히 쳐다보았다. 가자, 일단 들어가 보면 알 거 아니가. 나는 자신있게 그 친구의 손을 잡아 끌어 오락실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는 동전을 바꿔주는 조그만 개구멍 비스무리한 게 있었는데, 간신히 얼굴만 보일듯 말듯한 그 구멍 안으로 나는 얼굴을 들이밀고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 친구 데리고 왔어요. 오늘 생일이라서 이 친구 한 명만 초대한 거에요. 아버지는 나와 그 친구를 번갈아 보고는 희미하게 웃으셨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내 친구가 우리집에 놀러온 것도 거의 처음인 듯 싶더라. 왜냐하면 맨날 맞벌이를 하셨던 아버지 어머니 덕분에 집에 보호자가 없는 경우가 태반이었고, 그 시절에는 보호자가 없는 집에 놀러가서 아이들끼리만 논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었기 때문이리라. 어쨌든 내가 우리집 아니 우리 오락실 가게에 데리고 간 첫 친구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하였다는 듯이 나와 내 친구에게 양손 한가득 50원짜리 동전들을 쥐어 주셨다. 나도 내 친구도 눈이 튀어나올 만큼 완전 휘둥그레졌다. 기뻐서 찢어질 듯 입꼬리가 올라간 채로 나와 내 친구는 오락기 앞에 앉아 오락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시간도 자꾸자꾸 흘러갔다. 아까 학교 마치고 처음 오락실에 도착했을 때가 오후 한두시쯤 되었던 거 같은데... 잠깐 화장실 다녀온다고 가게 바깥으로 나왔을 때에는 이미 해가 늬엇늬엇 지고 있었다. 배도 고프지 않았다. 나도 생일이랍시고 참으로 오랜만에 가게에 놀러왔었던 것이기에 이참에 원없이 신나게 놀아보자는 생각이 강했었나 보다. 어머니한테 잔소리 듣지 않고 대단히 합법적으로 하루종일 오락을 해도 무방한 그날이 바로 내 생일이었던 게다. 렇게 다시 한참을 정신없이 오락을 하고 있노라니, 갑자기 아버지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셨다. 그 시절에는 미성년자인 학생들에게는 밤 8시까지만 오락실 출입이 허용되던 시절이었다. 지지난달엔가는 한번... 화장을 진하게 하고 사복까지 입은 어느 여학생이 8시 넘은 시각까지 오락을 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단속반이 떠서 그 여학생이 미성년자라는 걸 찾아내는 바람에... 아버지는 어이없게도 미성년자 출입을 이유로 "30일 영업정지" 를 당하신 적이 있었다. 그 여학생 하나 때문에 다섯 식구가 무려 1개월 동안 마땅한 수입도 없이 굶어죽을 뻔... 진짜 각자 자기 손가락만 빨아먹고 살아야 할 정도로 괴롭고 힘든 나날들을 보내야만 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다시는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고자, 저녁 8시만 되면 오락기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진심 적극적으로 미성년자들을 색출해내어 조용히 귀가하게 하셨다. 단 유일한 단속 예외사항은, 보호자를 동반한 미성년자는 밤 8시 이후라도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어린 내가 그 당시에 내가 알기로는... 뭐 맞기는 맞는 얘기인 거 같긴 하다. 나는 종종 가게 문 닫는 늦은 시각까지 남아 있은 적이 있었지만, 가끔 마주친 단속반 아저씨에게 나의 아버지가 가게 주인임을 강조하였을 때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까. 암튼 아버지는 나와 내 친구를 제외한 모든 미성년자들의 귀가를 재촉하고 계셨다. 끝까지 가게를 나가지 않으려는 지독한 오락 중독자 어린이들에게는 내일 아침에 다시 오라며 천원짜리 한 장씩 쥐어주시면서까지 말이다. 덩달아 얼굴이 발개지면서 적잖이 당황한 모습의 내 친구에게, 나는 전혀 걱정하지 말고 그냥 하던 오락이나 계속하라는 진심어린 격려와 응원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나도 내 친구도 혹시나 악당 대빵과 싸우다가 죽지나 않을까 마음을 졸이며 계속해서 끝판을 깨어가고 있었다. 저녁 8시에 미성년자들을 쫓아낸 이후부터는 가게 내 손님들이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미성년자들이 없어지다 보니 대놓고 담배를 죽어라 끊임없이 피워대는 아저씨들도 점점 늘어났다. 그렇게 온통 담배 연기로 가득 차 눈이 아플 정도로 실내 공기가 매쿼하게 탁해져 갔다. 이윽고 밤 10시쯤 되었을까. 어느덧 가게 문 닫을 시간이 되었다. 아버지가 오락기 전원들을 빠짐없이 끄기 시작하시면서 차츰 가게 문 닫을 준비를 하셨다. 내 친구는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아니 오락기 화면 그 스크린 안으로 들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온 힘을 다해 전자 오락에 심취 아니 몰입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가게 문 닫아야 한다고 내가 한 세번쯤 얘기를 하다 못해 그 친구의 등허리를 세게 두드리고 나서야 그 친구는 하던 오락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집에 안 가면 안 돼. 아. 이 친구는 하루만에 전자 오락의 노예가 되어버렸나 보다. 너무도 아쉬워 하는 그 친구의 손을 이끌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밤 늦었으니 이제는 집에 가라. 너네 부모님 걱정하시겠다. 내 친구는 그래도 뭐가 그리 아쉬웠는지 련어린 눈빛으로 가게 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문득 정신이 차려졌는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맙다. 생일 초대해 줘서 진짜 고맙다.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내년 네 생일에도 꼭 초대해 주라. 나는 그 날 내 친구에게 생일 케이크나 맛있는 과자는 고사하고라도... 당시 유행하던 오렌지쥬스는커녕 시원한 물 한 잔조차 제공하지 않고도 그 친구가 결코 잊을 수 없는 평생에 가장 기억남는 "친구 생일파티" 를 선사한 것이리라. 참고로, 그 다음해에는 가게 정화조가 터져서 아버지의 오락실이 급작스레 문을 닫게 되는 통에 나는 그 약속을 지킬 수가 없게 되었다는 슬픈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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