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팬
강남역 지하철에 들어서니, 나는 알지도 못하는 어느 가수의 생일을 축하하는 광고 전광판이 요란하다.
서울 중심가 지하철역에 비싼 광고비를 기꺼이 치르는 그 가수 팬들의 못 막는 사랑, Fan心!
예술의 전당 부근 한 카페.
그날따라 카페가 온통 한 청년의 사진으로 가득했다.
한편에는 꽃다발 등도 놓여있었다.
카페 주인 아들 생일인가?
우리 곁에 대여섯 명의 여자들이 부산스럽다.
알고 보니, 전역한 어느 아이돌 가수 콘서트가 조금 후 있단다.
그들은 전국에서 모인 팬들이고 그 카페를 그날 부분 빌려 장식했단다.
아가씨도 있지만 아줌마도 있었는데 그들의 행복한 얼굴이라니!
누가 무어라 하든 자기가 좋다는데.
그래서 돈도 주고 마음도 주고 시간도 준다.
팬심은 짝사랑.
짝사랑은 대상에 한계가 없다.
자기가 좋으면 누구라도 사랑 가능.
짝사랑은 시기에 한계가 없다.
미칠 듯이 사랑하다가 시들하면 언제든지 끝 ~
나는 상대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데 상대는 나를 모른다.
짝사랑은 '짝'이라서 주기만 하고 받지는 못하는 서글픈 사랑.
대부분 돈은 안 들기는 하다.
그러나
아이돌을 사랑하는 팬심은 굿즈를 사고 비싼 콘서트로 용돈을 탕진.
무어가 좋아 쓸데없는 짓 하느냐는 주위의 비아냥은 감수한다.
내가 좋다는데...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도 열광하는 팬심의 대상이 있네.
'패티김'
80년대 파리에 체류할 때, 한국신문도 그곳에서는 며칠 후에 배달되던 시절,
그때 내가 이민가방 한편에 챙겨갔던 귀한 카세트테이프들, 찬송가 테이프 그리고 패티김 테이프.
화창한 날씨는 여름 한철 반짝, 세 계절이 매일 우중충한 그곳.
설거지하며 청소하며 듣는 그녀의 노래는 힐링템.
세월이 지나 나도 늙고 그녀도 나이 들어 드디어 은퇴하면서 고별 콘서트가 내가 사는 이 지방에서 열렸다.
거금을 들여 콘서트에 갔다.
백발이 성성한 그녀.
드레스를 입고 두 시간 동안 열창을 했다.
손자들이 관중석에서 사랑하는 할머니를 응원했다.
감동 감동!
여전한 그녀의 노래에 감동하고 그 나이에 그 체력을 유지함과 인생의 자기관리함에 감동했다.
나는 패티김의 팬이었다.
'빨간 머리 앤'
70년대 동서출판사에서 출간한 10권짜리 전집.
이 책이 없는 나의 소녀 시절은 생각할 수 없다.
어떠한 인생이라도 그 속에서 긍정과 행복을 찾는 법을 가르쳐 준 '앤'
빌려서 읽었던 그 전집을 나중 구입하려 했는데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2002년 재판된 그 책을 구입하여 책장에 모셔놓았다.
<앤 전집. 동서 출판사>
일본판 앤 애니메이션이 방송되면서 앤이 소녀들의 폭발적 사랑을 받게 되었다.
이후, 관련된 책들과 굿즈들이 홍수를 이루었다.
알라딘 서점에서 사 모은 나의 앤 굿즈.
앤 방석에 앉아 앤 폰거치대에 폰을 얹고 앤 파우치에서 볼펜을 끄집어내어 앤 공책에 글을 쓴다.
앤 달력에서 날짜를 확인한다.
앤 컵으로 물을 한잔 마시며 앤의 벚꽃 흩날리는 그녀의 집 그림퍼즐을 맞추며 잠시 그곳에 가 있는 듯한 행복을 만끽.
'앤이 하는 말' ' 앤의 고향에서 자라는 식물들' '앤이 사랑한 풍경'
이 책들 옆에는 앤 동화책들이 줄지어 있다.
나의 이 팬심에 동조한 한 지인이 보내준 장식판에 적혀있는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어'란 앤의 말.
싱크대 앞에 놓인 한 목판.
앤의 그린 게이블 집이 그려져 있다.
그 집 앞의 그녀 얼굴 위에 내 얼굴 사진을 덧붙였다.
나는 행복을 만드는 지존의 앤이 되었다!
나는 앤의 찐팬.
이 고장 예술의 전당에는 시립청소년합창단과 성인으로 이루어진 시립합창단이 각각 있다.
지휘자들은 몇 년 간격으로 바뀐다.
언젠가부터 청소년 합창 공연이 참 좋아졌다.
어느 지휘자.
이력이 만만치 않은데도 청소년지휘자.
성인합창단 지휘자가 워낙 세계적인 분이라 그곳에 가지 못하신가?
아니다.
청소년 시기에만 부를 수 있는 특별한, 세계의 아름다운 노래들을 소개해 들려주신다.
보통 12월에는 비싼 성탄 콘서트가 많다.
작년 11월 말, 청소년합창단의 '미리 크리스마스 ' 공연이 잡혔다.
시립이라 가격도 좋은데 프로그램까지 완벽했다.
가족 예약을 하면서 생각해 보니 이 지휘자분 덕분에 청소년합창단 공연에서 참 아름다운 노래들을 즐긴 게 생각났다. 행복한 시간 시간이었다.
이런 분은 응원해야 돼.
그런데 나는 나에게 놀랐다.
이 나이에도 누구에게 응원 감사 피켓을 흔드는 열정이 있구나.
'ㅇㅇㅇ님, 감사합니다' 보드지에 크게 써서 가방에 넣어 공연장에 갔다.
프로그램도 좋았고 음악은 완벽했다.
합창단원들과 지휘자의 일체감이 아름다웠다.
마지막 곡이 끝나고 박수가 이어질 때 나는 얼른 준비해 간 보드지를 끄집어내어 흔들었다.
그런데 이상하네.
다른 분들도 응원보드를 흔드네.
공연을 마친 지휘자가 계속 '그동안 감사했다'라며 눈가를 훔친다.
에구머니나...
로비에 나오니 그분이 나가시는 성당 신자들이 떼를 지어 현수막을 펼치며 응원하고 있었다.
이 공연을 마지막으로 다른 곳으로 가신단다.
내 인생길에서 또 한 명의 귀인이 스쳐갔고 나는 여전히 늦게야 알아차리는구나...
나는 한 지휘자의 팬이었다.
(부산 청소년시립으로 가신 천선생님)
다들 할머니가 된 친구들.
핸드폰이 프사부터 남편이 아니라 손주들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다.
혼자보기 아까워 주위분들에게도 핸드폰을 열어 자랑 자랑.
어화둥둥 내 사랑.
할머니들은 아기들의 찐팬.
이럴 줄 알았으면 자식 낳지 않고 손주부터 볼걸.
그러나
영원한 아이돌은 연약한 인간도 책의 주인공도 아니다.
나 위해 피까지 흘리신 예수님.
나의 최고봉이신 예수님!(이라고 말은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그분을 자주 잊어버린다.
그분은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는데
나는 그분을 가끔씩 생각한다.
그분은 항상 나를 보고 계시는데
나는 세상에서 볼 게 너무 많아 그분 을 가끔씩 본다.
내가 예수님의 팬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팬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
송구스럽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