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늄꽃
지난여름이 정말 덥긴 더웠구나.
지난 십여 년간,
더위가 누그러지는 초가을쯤 되면 피기 시작하는 우리 집 베란다 제라늄.
주황색 꽃대가 세 개, 흰 꽃대가 하나 있는 넓은 화분의 제라늄.
초가을부터 겨울을 지나 초여름까지 한 화분에 거진 20~30개의 꽃이 피었다.
여름이 오고 장마가 시작되면 비실비실 시든다.
그러나 시든 윗가지를 잘라버리고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신기하게도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한다.
장마 때 혹시? 했다가 초가을이 되면 역시!
풍성한 꽃들이 피어나며 십여 년간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여름이 끝날 즈음
시들은 가지들을 정리하다 보니 세상에! 뿌리까지 까맣게 썩어있었다.
흰 제라늄 대가 거진 세대, 흰 꽃이 하나였는데 흰 것 하나만 살아 있었다.
그동안 풍성한 제라늄 이 화분이 있어 계절이 바뀔 때, 굳이 새 꽃 화분들을 들여놓을 필요가 없었는데.
추운 겨우내 화려한 이 꽃으로 마음이 따뜻했는데.
지난여름 시원한 곳으로 옮겼어야 했는데 자책.
오랜 식구가 사라졌다.
섭섭하다.
대세였던 주황 꽃에 비해 한구석에 몇 송이만 피던 흰색 제라늄 줄기만이 넓은 화분에 휑하게 남았다.
붉은 꽃을 사서 저 빈 공간에 심어야겠네 생각만 하고 있는 동안 날씨는 시원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예전 몇 송이만 피던 흰 제라늄꽃이 주황이 사라진 그 공간을 열심히 채우고 있었다.
마치 주황 꽃은 예전에 없었다는 듯이.
붉은 제라늄을 한대 사서 흰 꽃 사이에 심었지만 대세는 흰 꽃들.
화분이 가득해졌다.
다시 베란다가 환해졌다.
세상일이란
이것 없으면 저것이.
이가 없으면 잇몸이.
호랑이가 떠난 산에는
토끼가 산을 다스린다.
절대로 그것이어야 하고
절대로 그 사람이어야 하고
절대로 그곳이라고 우길 필요가 없다.
그래서
세상은 이어지나 보다.
그대
상실에 슬퍼 말아요
하나님께서
또 다른 선물을 준비해 두셨어요.
더 좋은 것일 수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