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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물연,47년 된 휴지통

물연이 인연으로

by 제이

물건도 오래되면 가족이 된다.

역사가 된다.

사람이 본시 빈손으로 세상에 태어났지만 살다 보면 이런저런 물건들을 사용하게 된다.

사서 잠깐 쓰다가 폐기하는 것들.
장롱에서 묵히기만 하다가 결국 바이바이 하는 것.
사고 보니 어쩐지 발이 불편한 구두.
내가 미쳤나 봐 노란 재킷을 사다니.

그러나 사람 간의 人緣처럼 物緣이 닿아 두고두고 동거하는 것들도 있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네.
어느 날,
집안 이런저런 물건들을 보니
몇몇 물건들이
세 차례의 해외이사, 십여 차례의 국내 이사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패션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주인의 변덕에도 불구하고,
내 곁에 있는 것들이 있었다.
마치 가족처럼.
희로애락의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내어 가족이 되어버린 物件들.

'30년 된 금성 냉장고'는 전에 쓴 바 있다.
이 글은 특히 Daum 메인에 올라 11000회 이상 조회가 되었다.


그중 우리 가족, 연두색 플라스틱 휴지통 이야기.

처녀 적 내 방 한편에 있던 휴지통.
1980년 결혼 때, 나는 내 방에서 쓰던 물건들을 용달차로 신혼집으로 날랐다.
이것저것 싣다가 눈에 띈, 책상 옆의 플라스틱 휴지통.
별것은 아니지만 당장 필요할 거니 가져가 써야지.

그렇게 그 애는 신혼집으로 따라왔다.


그 애는 처녀 적, 이 삼 년간 쓰던 플라스틱 휴지통.
신혼집에서 신박한 걸 사기까지만 임시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휴지통이라는 게 매일이다시피 사용하는 거고 쓰다 보니 딱히 바꿀 계기가 없었다.
그렇게 동거하다 보니 아유~ 47여 년이 되었다.

처녀 적 교사 시절
학교 시험문제 낼 때 폐지.
밤새 친구에게 편지 쓰다가 뭉개버린 종이들.
신혼 때
남편의 지난 월급봉투.
아기의 콧물 똥오줌 휴지들.
장애인 둘째를 낳고 흘리고 흘렸던 눈물범벅의 휴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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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가 생후 반년도 안되어 남편이 프랑스로 이년 기약으로 떠났다.
일 년간 젊은 부부는 매주 편지를 썼다.
(기적적으로 일 년 후 파리에서 상봉 )
남자는 갑자기 처한 이국의 알딸딸한 고독 속에 편지를 쓸 때
여자는 연년생 두 애들이 그녀의 등위에 올라가고 쓰던 볼펜을 빼앗아 편지지에 환 칠을 하는 난리 통에서 쓰다가 버린 편지지는 이 휴지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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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에 또 대학원에 들어가 리포트를 쓰다가 버린 폐지들.
(컴퓨터가 상용되기 전)

세월이 흘러,
결혼한 딸아이가 딸아이를 낳고 친정에서 산후조리를 했다.
쓰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종이기저귀.
막상 산후 구완을 하다 보니 힘들어 천 기저귀는 언감생심.
손주의 일회용 기저귀가 마구마구 이 휴지통으로.

이제 칠순이 넘었다.
언제까지 이 애가 내 곁에 있을지.
혹 양로원에도 따라올는지...
이 휴지통에 또 어떤 것들이 담기려나..

47여 년간
나의 웃음과 눈물을 바로 내 곁에서 같이한 휴지통.
그래
너는 나의 사랑하는 가족이구나.

역사구나.


얼마 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렸던
'My story. Our History
나의 보물, 우리의 현대사'




강물처럼 흘러가 버리는

보이지 않는 시간의 역사를
한 물건이 켜켜이 쌓아 붙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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