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다 받아보는 아파트 관리비 명세서. 내가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것은 지난달 전기 요금. 세상에서 내 나름 은근 즐기는 게 몇 개 있지만 그중 하나가 '도전! 우리 집 전기료 아끼기'
난방비는 아끼는 종목이 아닌데 다행히 지역난방이고 그건 따로 계산된다. 딸네 집에 있는 건조기, 청정기, 딤채, 정수기가 우리 집에는 없다. 빨래는 햇볕에 널어 말리고 물은 '브리타'필터에 걸러 마시고 김치는 조금씩 해서 먹거나 사서 먹고 하루 두번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한다. 집의 방향이 좋아 하루종일 밝으니 전등은 최소로 켠다. 아들이 장애인이라 월 몇천 원 할인도 된다. 몇 년 전 어느 달은 할인까지 되어 천원단위 요금이 되어 나의 이 취미생활의 극점을 찍었다. 와우!!! 흥분한 나는 축하 케이크로 촛불을 밝히느라 돈이 좀 나갔다. 나의 절전 취미는 돈의 문제보다 성취감.
나는 유독 필요 없는(내 관점에서) 전등 끄기에 진심이다. 어떤 것에는 낭비가 심하건만 유독 전기에는 신경을 쓴다. 필요 없이 켜져 있는 전등불을 보면 심사가 불편해지는 건 병인가 검소함인가? 그것도 내 것 네 것 우리 것 가리지 않고.
새벽의 교회, 사람도 별로 없는데 로비 여기저기 환하게 켜져 있는 불. 아침 운동하러 가는 빌딩 내 통로, 옆 창가로 햇빛이 훤히 비치고 있는데도 수십 개 켜져 있는 전등. 내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심사가 불편하다. 지나가다 일부는 꺼버린다. 어느 날, 일찍 청소하러 나오신 아주머니께 딱 걸렸다. "불을 왜 끄세요?" 묻길래 "아니, 바로 옆 창으로 햇빛이 들어와 이렇게 밝은데요? 이게 아주머니 집이라면 켜 두실 건가요?" 대답을 안 하셨다. 그런데?
공공건물이나 공용으로 쓰는 곳에서는 절전 개념이 없는 것 같다. 결국 돌아서 자기 돈이 들 터인데. 그런데 바로 다음 달에 공용으로 바로 돈이 빠져나가는 우리 아파트 현관 불. 어둑해도 '시간'이 되어야 경비원이 점등하신다. 흐린 날도 '시간'이 되어야 불 켜신다. 나는 지나가다 '시간'에 관계없이 어둑하다 싶으면 호기롭게 아낌없이 스위치를 탁 올린다. 쓸 데는 쓴다.
아직도 가끔씩 생각나는 80년대 봤던 어느 단편소설.
어느 신혼부부. 해외근무를 나가게 된 그들의 친한 친구. 주인공 부부는 홀로 남겨진 그 친구의 늙은 어머니를 자기 집에 살게 해 드렸다. 친구 어머니와 같은 집에 살게 되면서 이외의 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늦은 밤, 친구 어머니가 때도 없이 그들의 방문을 슬며시 여시는 거다. "아이고... 밖에서 보니 불이 켜져 있길래 불 끄지 않고 잠들었나 싶어서. 불 꺼주려고 방문 열었다네.." 친구 어머니의 빛나는 절전 정신으로 때도 없이 신혼부부의 문을 여시는 행동에 주인부분가 아연실색했다는 이야기.
50년대 내가 어릴 땐, 전기가 종일 들어오는 게 아니었다. 저녁 몇 시에 불이 일제히 자동으로 들어왔다가 새벽 몇 시에 일제히 꺼진다. 물론 전기 요금은 균일가였겠다. 그 당시 전기제품은 오직 60촉 백열전등. 아예 가전제품이라는 게 없었다. 다리미는 숯불을 넣은 다리미와 인두. 청소는 빗자루와 걸레. 밥은 연탄불에 냄비. 물은 우물물이나 수돗물을 그냥 먹으면 된다. 빨래는 동네 개울가나 우물에서. 공기는 맑고 물은 깨끗했다. 전기다리미, 청소기, 전기솥, 정수기, 세탁기, 공기청정기... 가전제품이라는 단어가 아예 없던 시절. 티브이, 컴퓨터, 스마트폰???
전기사용이 조금만 과해도 번쩍하며 두꺼비집 휴즈가 녹아 전기가 나가버리니 한 집에 쓸 수 있는 전등 수도 제한되어 있었다. 학교 시험 문제 중 하나가 '휴즈 바로 끼우는 법?' 연이은 작은 두 개 방 사이에는 벽 위쪽에 구멍을 내어 전등알 하나를 이 방 저 방 같이 쓴다.
때도 시도 없는 정전. 특히 저녁밥을 먹다가 정전될 때가 많았다. 이상하게도, 전깃불이 나가 컴컴한데도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식구들의 숟가락 소리는 계속된다. 집집이 양초와 성냥은 필수품. 이래저래 어두운 밤이지만 아이들은 나름 놀이를 즐긴다. 흔들리는 촛불 옆에서 손가락 그림자놀이. 어두운 밤, 가족들이 한 이불 아래 발을 넣고, 듣고 들었던 할머니의 옛이야기를 또 들어도 재미있다. 밤 마당에 서면 심상하게 보이던 은하수와 별들...
60년대 학교에는 아예 교실에 전등은 물론 전기선이 없었다. 여고시절 더운 여름방학, 가끔씩 학교 가면 몇몇 친구들이 호젓한 복도 여기 저기에 책상을 내어다 놓고 공부를 한다. 물 담은 바케츠에 발을 담그고... 창밖 운동장에는 매미소리가 시끄럽고 저 아래 바다에는 해수욕장으로 가는 만원유람선에서 울려퍼지던 유행가 소리.
90년대 초, 아들이 다니던 사립 특수학교 교실에도 전등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었다. 어떻게 미국에 가게 되어 그곳 특수학교에 아들이 등교한 첫날, 나는 그 교실 전등 숫자를 세었다. 12개!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에 치밀었다.
여고시절, 중간고사 전날이었다. 자취하는 친구네 집(방)에 모여 채 끝내지 못한 공부를 함께 밤새워 하기로 했다. 오랜만 오붓하게 만난 이 두 여학생, 시험공부는 제쳐놓고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 밤늦게 공부를 시작하려니 전기가 탁~ 나가버리네. 망했다... 그냥 자 버리고 동이 터자마자 학교로 달려가던 우리는 때 마침 숙직하시고 나오시는 담임선생님을 마주쳤다. 그 싱그러운 새벽의 추억.
해방 후까지 전력 생산시설은 88.5%가 북한에 있었다. 그런데 1948년 5월, 북한은 남한으로 보내는 전기 공급을 중단했다. 전기 사용이 제한되었다. 시간제, 격일제. 그래서 나의 어린 시절은 낭만적이나 불편한 어두운 밤들. 그 후, 발전기술과 시설이 좋아지면서 1964년에야 제한적 사용이 해제되었고 1978년 고리원자럭의 준공으로 다른 세상이 되었다. 1965년까지만 해도 농어촌 전기 보급률은 12%에 불과했단다.
국산 냉장고는 65년에 나왔지만 그 당시 냉장고 한대 값은 직장인 반년 월급. 국산 흑백 TV는 66년에, 컬러 TV는 81년에야 출시되었다. 컬러 TV 가격도 처음에는 일반 직장인 월급 6개월치. 거진 70~80년 이후에야 가전제품이 일반화되었다. 처음으로 친정에 냉장고와 흑백 TV가 들어오던 날, 온 가족이 흥분하여 만져보고 켜보고 난리가 났다. 세상에 이런 희한한 물건이 있구나. 방안에 극장이 있다니... TV방영 채널은 서너개. 아침 일정한 시간에 방송이 시작되어 '뽀뽀뽀 친구' '오늘의 요리'등을 하다 오전에 끝난다. 오후 너덧시경 다시 시작되어 자정이 되면 애국가가 울리고 '지지찍~'하며 종영된다. 물론 통행금지도 있어 문밖 외출도 밤새 금지.
연일 35도를 오르내리는 작년 폭염. 해마다 더 더워지는 것 같다. 냉방된 차에서 내리니 살갗까지 따갑게 하는 열풍에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에고, 이래서 더위에 노인네들이 힘들구나. 저녁에 잠깐 나갔더니 집집마다 에어컨 실외기 소리가 붕붕붕... 그 실외기가 내뿜는 열기에 기온은 더 올라가고 실내 에어컨은 더 열일을 한다. 악순환.
내가 어릴 때, 그 도시에 화력발전소가 생겼 다. 전기 상황은 좋아졌지만 마당에 널어둔 빨래에 앉는 검댕이들. 깨끗한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되면서 엄청 좋아진 전기 상황.
우리나라 에너지 수입 의존도는 놀랍게도 92.8%.(2020년 현재 ) 대부분의 전기 재료를 수입하고 있다. 1인당 우리나라 에너지 소비량은 세계 4위로 많다. 전기 요금은 OECD 38개국 중 두번째로 싸다. 1KW당 덴마크는 687원. 독일은 652원 일본은 331원. 우리나라는 126원. 싸니까 부담 없이 마구마구 사용하니 당장은 좋기는 하다. 그러나 누군가가 언젠가는 그 차액을 메꾸어야 할 텐데 손주들아 미안하다 너네들이...
언젠가부터 교량마다 색색의 멋진 전등들. 백화점 벽면을 타고 오르내리는 화려한 빛줄기들. 깊은 산속 절 입구까지 점령한 무엄한 LED 간판. 한여름에도 따끈따끈한 공공시설 화장실 비데들. (비데는 전기 먹는 하마) 요즘 집안 인테리어 수리하면 기본적으로 거실 등만 여나믄개 설치된다. 전기계량기는 지금도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다.
여름 호캉스 가는 어느 호텔. 앞에 최고급 호텔이 새로 지어졌다. 온 건물을 이태리식으로 지었다. 그러나 한밤중에도 사위를 온통 조명 전등으로 환하게 멋 내느라 이웃한 우리는 암막 커튼을 쳐야 했다. 그 호젓한 곳에서 해마다 보던 밤하늘의 별들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낮에는 일하고 어두운 밤에는 반딧불로 전등 삼아 공부했다는 옛날 선비들. 이젠 전등불이 생겨 밤도 낮처럼 밝게 사니 얼마나 좋은가. 각가지 전기용품을 써니 쾌적하고 편리하다. 그러나 세상일에는 공짜라는 게 없구나. 석탄, 석유 같은 화석연료는 CO2 같은 오염물질을 배출하고 그것은 지구 온난화를 일으키는 온실가스의 원인이 된다 지구 온난화는 결국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이상기온과 생태계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홍수, 쓰나미, 이상고온... 깨끗하고 마냥 좋기만 할 줄 알았던 원자력발전. 폐기물처리들의 문제를 알게 되고 이웃나라의 가공할 원자력발전소 사고를 보면서 차라리 '페기'를 외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전기료 인상이 겁나고 지금 누리는 전기제품의 편리함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구나.
예전이 좋았다고 말하며 여기저기 전등불을 족족 끄지만 나는 지금 누리는 놀라운 전기 문명을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그나마 오늘도 나는 외출할 때 콘센트를 확실히 끈다. 콘센트의 대기 전력이 가정 전기의 10%를 차지한단다. 이제 곧 선선한 가을이 올 것이고 에어컨은 끝. 그러나 신경 써서 에어컨 콘센트를 뽑아두지 않으면 내년 여름까지 당신의 에어컨은 열 받고 있고 사용하지도 않은 전기 요금을 더 내어야 한다는 사실! (한겨울, 에어컨의 계기판을 만져보라. 미지근하다.에구머니나. 너가 살아있구나.. ) 마냥 가까이 하자니 좋기는 하나 댓가를 치루어야하고 멀리 팽겨치자니 내 삶이 불편하네.. 전기, 그 사랑과 미움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