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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Jul 03. 2024

45년 전 남자친구를 찾습니다

남자친구와 남편은 이름이 같다.

                (출처datpiff.com)


(이 글은 칠순 넘은 내 친구와 그녀 남편의 이야기.
60대 이상 이신 분만 읽기 추천)

예전 남자친구를 찾습니다.


기대고 싶고 그 그늘에서 쉬고 싶은

큰 나무 같았던 그.
나의 모든 것을 받아주었다.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침착.
배려, 용납, 공감, 자상함.
그 청년의 눈은 맑았고 머리는 차가웠고 가슴은 따뜻했다.

그러나
44년간 함께 살고 있는 지금 나의 남편.
10여 년 전 퇴직하고 가끔씩 일을 나가나  많은 시간을 부인과 함께 한다.
한때 자기 전공분야로 꽤 유능하게 인정받았으나 집안에 들어앉으니 모든 생활에 서투르고 낯설다.
할 수 있는 요리는 오직 라면 하나.
설거지는 이제 가끔 하기 시작했으나 부인이 살짝 검사, 부분 다시 헹군다.
세탁은 빨랫감을 구분 없이 그냥 세탁기에 넣어 '돌리면'되는 걸로 안다.
세탁한 빨랫감을 좀 널어 달라 부탁하면 건조대에  '걸친다.'

세월의 풍상에 그 푸르던 나무가 점점 마른다.
부인의 작은 잔소리에도 이파리가 후드득 떨어진다.
그리고 반격이 시작.

예전,
맑은 눈의 푸른 시대(靑年)의 남자친구와 다방에서 만나곤 했다.
음악을 들으며 소곤소곤 담소를 나눈다. 같이 있는 게 꿈같았다.
지금 남편은, 일단 카페에서는 커피보다 달달한 케이크를 선호.
부인과의 담소보다 혼자서 스마트폰으로 유튜브의 국제 정세나 북한 관련 기사를 본다. (왜 국제정치 관련 유튜버는 거의 늙은 경상도 남자일까?)
그도 저도 마땅치 않으면 달콤한 잠에 빠진다.
(그래서 카페 가면 되도록 잠을 방해받지 않도록 구석진 곳 선호.)

아!
예전 맑은 눈의 그 남자친구와 다시 한번 다방에 갔으면..
'그 다방에 들어섰을 때 내 가슴은 뛰고 있었네...'
70년대 '펄시스터즈'의 노래는 이젠 노래일 뿐.

처녀 적 나는 배우자의 로망이 있었다.
첫째, 고학해 본 이.
나 자신이 대학시절 내내
입주 가정교사나  레슨으로 고학했으니.
둘째, 장남은 싫어.
친정이 종가 집이었다. (이젠 추모예배로 간소히  제사를 대신한다.)
그때는 매년 제사가 너덧 번. 제사와 명절마다 한 포대의 콩나물 다듬기, 종일 전 부치기, 재 가루로 유기그릇 광내기, 많은 친척들로 인해 끝없이 나오는 설거지 감.
네 명의 남자형제들 속 고명딸인 나는 고명이 아니라 식모였다.
종갓집은 싫어.
셋째, 군필자, 특히 장교 출신.
멋지잖아?
넷째, 키가 컸으면.
마음도 넓을 테니...
다섯째, 일단 내가 본 책을 다 읽은 이. 감수성이 풍부할 터다.

야호!
하나님께서 딱 그런 분을 주셨다.
룰루랄라, 꿈같은 결혼식.

40여 년이 훌쩍 지나 보니
내 꾀에 내가 빠진 느낌.
남편은 8형제의 어려운 환경에서 힘들게 성장했다.
그의 성장 스토리를 들으며 나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입지적 스토리였다.
나중에 알은 건, 그는 자신이 힘들게 살았다고 생각지 않는다는 것.
'뭐 그 시절은 다 그랬는데...'
이런 식.
나 혼자 감동 흥분한 셈.

그의 어릴 적 경제적 궁핍은 살다 보니 경제적 무개념으로 나타났다.
어느 날 발견된 그의 비밀통장.
10여 곳에 매달 후원금 이체가 되고  있었다.
이런 그에게 나 같은 알뜰살뜰한 부인이 있음은 오로지 그의 福!
8형제 중 7번째라 장남을 기피하던 내가 얼씨구 했던 것은 자충수에 빠진 것.
장남이 아니라서, 힘들었던 친정의 제사는 없었으나 시댁의 이런저런 일에 해결할 여유를 가진 이는 오롯이 남편

ROTC 장교 출신이라 예전 그의 무용담을 들으면 화려했다.
그러나 날씨가 슬슬 추워지는 가을이 되면 따뜻한 곳을 먼저 찾는 이는 남편.
이리저리 골골하며 드러누우신다.
'전쟁이 나려면 따뜻한 계절에 나게  해 주세요. 이분 중위님은 추우면 전쟁 못 나가요'  기도할 뿐이다.
그런데 이젠 나이 들어 방위가 되어 전방엔 안 나가도 된다네... 감사하지.

키 큰 남자 좋아했다.
그런데 늙어서 먼저 아프거나 치매 라도 걸리면 나보다 20kg이나 더 나가는 이분을 어떻게 돌본담.
그리고 키와 마음 크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마음 크기는 차라리 나이에 반비례한다는 사실. 삐치기, 버럭.

내가 봤던 책은 다 본 그 청년.
어느 책의 어느 부분을 말하면 다 맞장구쳐주었다.
아니 내가 손도 못 대었던 책들도 가볍게 섭렵했던 청년.
얼마나 상식, 공감, 배려심이 있을까, 좋아!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성인 ADHD 기질이 조금씩 드러난다.
무감동 무감각 무책임...
하기야 이분뿐 아니라 자기 친구들 대부분이 그러니 딱히 검사할 필요도 없는 노인 증상인듯하다.

예전 자기가 선 보았던 한 아가씨.
"요즘 어떤 책 보세요? "물었더니 그녀의 대답이 '엘레강스'(여성 잡지)
그 일을 회상하며 웃었다.(비웃는 거지)
그런데 이분 요즘 은근히 TV 홈쇼핑을 보기 시작하시네.  먹음직한 먹거리들.
물론 절대 주문은 안 한다. 그냥 보는 거다...
예전 그 맞선녀는 지금쯤  혹  니체를 읽고 계시지 않을까?
아니면 그녀도 지금 이분이 보시는 이 홈쇼핑을 보고 계시려나?
문득 최백호의 `낭만에 대해서` 가사가 생각나네.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서 나처럼 ​
 (어갈까)  홈쇼핑을 볼까..'


그런데
예전 그 남자친구랑 지금 남편이랑 얼굴이 조금 다르지만 닮았다.
풍성한 머리카락을 나부끼던 젊은 날의 남자친구.
뒤통수 머리카락이 사라진 지금의 늙은 남편.
희한하게
이름이 똑. 같. 다!

예전 최희준의 노래
'엄처시하'에서 알 수 있듯이.
열아홉 처녀 때는 수줍던 그 아내,
결혼하더니  고양이로 변했다.
살다 보니 무서운 호랑이가 된 아내.
에구 무서워~
살아남으려고 공처가를 선택한 불쌍한 남편.​​


https://youtu.be/4g7mbAh20hg?si=VDcYuRV57-NZMB3r



그러나 어디 남자만 변했을까?
윗글에서 '남편'대신 '부인'을 넣어도 똑같은 이야기가 될 터다.
'예전 남자친구를 찾습니다 '대신
'예전 여자친구를 찾습니다.'
생각만 해도 심장이 뛰었던 천사 같은 전 여자 친구.
보기만 해도 심장이 멈추는 무사 같은 지금 아내.
이슬 먹고사는 듯하던 전 여자친구와
먹는 게 세상 낙인 듯한 지금 마누라
등등...
전혀 다른 옛 여자 친구와 지금 마누라 이름이 똑. 같. 다.

어마나.
어떻게 알고  당신 부부 이야기를 썼냐고요?
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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