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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지영 Jan 24. 2023

믿는 대로 성장하는 아이들

  시대가 이렇게 변할 줄 몰랐다. 요즘에 비하면 내가 영어를 배울 때는 원시시대나 다름없다. 1977년 중학교 1학년 때, 나는 영어 수업 시간에 알파벳을 처음 배웠다. 펜촉에 잉크를 찍어서 공책에 정성스레 알파벳을 쓴 것이 영어 수업의 시초였다. 인쇄체 대문자 소문자, 필기체 대문자 소문자. 중고등학교 내내 문법위주의 수업, 독해와 문제 풀이가 영어공부의 다였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1982년, 영어 선생님은,

  "너희들이 대학에 들어가면 원서를 공부할 경우가 생긴다. 어차피 영어과가 아닌 다음에야 외국인을 만나는 일은 드물 것이고, 원서를 독해하고 번역하는 수준이면 충분하다. 그러니 문법 위주로 공부하면 된다. 당연히 학력고사도 잘 치를 수 있고."

  이렇게 우리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영어 회화 수업을 받지 못했다. 지금은 영어 공부의 트렌드가 완전히 바뀌었다. 


  세계화 국제화가 되고, 우리나라의 경제적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각계에서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미 대도시에서는 조기영어교육이다 영어 유치원이다 해서, 영유아부터 영어 공부를 해왔다. 대도시의 학부모 학력이 높아짐에 따라 자녀의 영어 공부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상황이었다. 반면에 농어촌 지역에서는 대도시와는 교육환경이 판이하게 달랐다. 정부에서는 공교육의 평등한 제공을 위하여 초등학교 3학년부터 영어 수업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1997년인가부터 초등학교에도 영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교육부의 초등3학년 영어수업을 위해서, 학교 현장에서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각종 연수를 비롯해 개인 연수를 받기 시작했다. 때로는 영어 회화 학원에 등록하는 교사들도 있었다. 나는 방과 후에 동료 선생님들과 그룹을 이루어 영어 회화를 공부하였다. 안 되는 일은 없었다. 우선 영어 수업에 필요한 교실 영어 위주로 익혔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영어 회화가 늘어야 하는데, 제자리걸음이었다. 지속적으로 영어 공부를 하지 못했다. 영어 회화가 늘지가 않았다. 다행히 학교현장에서는 교과전담교사제를 도입하였다. 영어교과전담교사는 담임을 맡지 않고 영어만 가르치도록 하였다. 휴, 영어 수업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났다. 요즘 교대를 졸업하는 후배교사들의 영어 실력은 정말 우수하다. 


  이러한 영어 열풍 속에서 나도 내 딸들의 영어 공부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던 중, 큰딸 다영이가 중학생이 되었다. 멋진 교복을 입은 모습이 대견하였다. 고맙게도 외형적으로만 나를 감동시킨 게 아니었다.  

  "엄마, 중학교에 오니까 공부가 뭔지 알겠어. 재밌어. 국어 수학 영어 다른 것도 다 재미있어. 히히힛!"

  초등학교 때 교과 공부에 대한 부담을 주지 않고 실컷 놀게 했더니, 이제야 공부에 재미를 붙였나 보다 생각했다. 얼마나 다행인지. 나는 큰딸을 믿었다. 큰딸이 믿는 대로 성장했다. 고맙기 그지없었다.

  "그래, 다영아, 공부가 재미있다고 하니까 나도 기분이 좋다."

  "근데, 엄마, 영어는 원어민과 대화하는 걸 배우고 싶어. 그래서 원어민이 있는 학원에 갔으면 좋겠어."

  "그래, 그럼, 네가 한 번 알아볼래?"

  다영이는 친구들에게 물어서 oo학원을 알아냈고, 다영이와 함께 학원에 가니, 문법이나 문제풀이보다는 회화 위주의 영어교육을 하는 걸 알게 되었다. 다영이가 원하는 데라서 등록하였다. 3년간 그 학원에서 원어민과 대화하며 공부를 하였다. 


  그 당시는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의 해외어학연수가 붐을 이루는 시기였다. 단기나 장기로 어학연수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돈이 많은 사람은 미국이나 영국 등 서구로 연수를 보냈다. 돈이 좀 부족한 사람들은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보냈다. 나는 외벌이라서 어학연수를 보낼 형편이 못되었다. 어학연수는커녕 해외여행도 갈 형편이 되지 못했다. 나는 해외어학연수를 시키지는 못해도 꿈을 심어 주고 싶었다. 어디 가면 외국인을 많이 볼 수 있을까 생각한 끝에, 인천국제공항을 떠올렸다.


  두 딸을 내 차에 태우고 인천국제공항에 갔다. 나도 처음 가보는 공항이었다.

  "여기가 인천국제공항이야. 외국을 나갈 때는 여기서 비행기를 타거든. 물론 올 때도 여기로 오고. 너희들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이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다녀오는 멋진 사람이 되면 좋겠어."

  딸아이 둘은 신기했는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으로 된 안내 책자를 가져왔다.

  "다영아, 다정아, 지금은 거기 써져 있는 게 뭔지 모르지만 너희들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면 다 알 수 있어. 저기 외국인들 보이지? 그들과 대화도 할 수 있는 멋지고 유능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아이들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내 말을 경청했다. 두 아이가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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