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의 기록)
인천의 외곽 지역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교감 선생님이 추천해 준 학교였다.
"강 선생, 강 선생이 근무할 학교는 여기서 멀어요. 살던 곳에서 멀리 떨어져야 그간의 일들을 잊고 새로운 생활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추천한 학교입니다. 30분 이상 차를 타고 달리다가 산 넘고 물 건너면 산 밑에 조그마한 학교가 있어요. 내가 데려다 줄게요. 같이 갑시다."
교감 선생님께서 조금 과장해서 말씀하셔서 그렇지, 완전 시골은 아니었다. 이렇거나 저렇거나 나는 교감 선생님을 믿고 따랐다. 가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내가 사는 곳만 알았다. 인천살이 자체가 타향살이였다.
3월에 꽃샘추위가 와서 눈이 많이 내렸다. 교실 창가에 서서 보니, 바로 옆이 산이었고 그 주변에 밭이 있었다. 산에도 밭에도 학교 담장에도 눈이 '평등하게' 내렸다. 자연은 늘 고른데, 사람 사는 세상만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나만 힘든 것 같았다. 나만 외로운 것 같았다. 그런데 학교에서 학생들과 지내다 보니, 외로울 겨를이 없었다. 신체적으로 과하지 않을 만큼의 일은 생활에 활력을 주었고,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도 내가 감당해 낼 만했다. 학교 생활이 재미있어졌다. 나를 그곳에 데려다준 교감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꾸벅)
4월인가 5월인가 봄이 되자 학교밖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호미 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호미질을 하면서 무슨 얘기들을 그리 정답게 하는지, 얘기 소리와 웃음소리가 2층 교실까지 들렸다. 내가 시인이었으면 시라도 한 편 남겼을 텐데, 들은 걸 귀에 담아두기만 하였더니 어느샌가 다 사라지고 말았다. 경치는 시골스러웠지만 학부모들의 직업 중에 농부는 없었다. 그러니까 근처의 어르신들이 소일거리 삼아 텃밭 농사를 짓는 형태라는 것을, 교감 선생님께 나중에 들어 알았다.
큰딸 다영이가 초등 3학년이 되었다. 나도 3학년 담임이 되었다. 연구부장 선생님이 우리 아이 담임을 맡아 주셨다. 나는 다영이가 공부를 아주 잘하지는 않더라도 선생님의 수업을 따라갈 정도만 되면 된다고 생각하여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큰딸 담임 선생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허허, 다영이 어머니, 다른 아이들 가르치는 데만 열중하지 말고, 다영이 수학 좀 가르쳐요. 수학이 부족하네요."
이제까지 큰딸 다영이가 학교 공부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담임 선생님 말씀이 맞았다.
나는 집에 와서 다영이의 수학 교과서를 훑어보고, 문제를 어떻게 풀었는지 물어보았다. 속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잘 따라오던데, 다영이가 수학 문제를 풀지 못하니까 나는 당황스러웠다. 화도 났다. 다영이는 주눅이 들어 더 이상 나와 일대일 학습이 안되었다. 하는 수 없이,
"다영아, 네가 혼자 공부하다가 질문하는 것만 대답해 줄게. 가능하면 담임선생님께 질문하는 게 더 좋고."
이렇게 하여 다영이와의 하루 공부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나중에 들어 보니, 나의 냉담한 태도가 다영이에게는 충격이었다고 했다. 미안했다. 그러나 그때 내 감정은 진심이었다.
그러고 나서, 다영이는 나에게 수학 공부는 물론 다른 교과에 대해서도 물어오는 게 거의 없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담임 선생님께 질문하는 횟수가 늘어났다고 했다.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다영이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니, 스스로 찾아서 공부하는 태도를 보였다. 나는 그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때 다영이는 교과 공부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초등학교 때는 공부에 대한 흥미만 잃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 내 소신이었다. 언젠가는 잘하게 될 거라고 기대했고 그렇게 믿었다. 그 대신 다양한 경험을 시키고 싶었다. 특히 내가 예체능에는 속된 말로 젬병이라 내 아이에게만은 예체능을 가르치고 싶었다.
그 당시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 젊은 남자 선생님이 계셨는데, 사물놀이 지도로 유능한 분이었다. 나는 그 사물놀이부서에 다영이가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4학년 학생부터 모집한다고 했다. 1년을 기다렸다가 기회를 잡았다. 기회를 잡았다고 해서 '비리'가 있었다는 말은 아니니, 오해는 마시길. 특별활동 부서를 사물놀이로 정하여 다영이가 사물놀이를 배우게 하였다. 다영이는 뜻밖에도 잘 적응하였다.
더운 여름날, 음료수를 가지고 학교 옥상에 올라가 보았다. 아침부터 내리쬐는 여름 햇볕을 고스란히 받으면서도 연습에 열중하고 있었다. 선생님도 고맙고, 다영이도 고마웠다. 6학년 때까지 이어졌다. 사물놀이부는 아침 수업 전에 학교 옥상에서 연습을 하거나 방과 후에 운동장에서 연습하였다. 다영이는 3년간 장구를 했으니 그 실력은 아주 우수하였다. 운동회날 사물놀이부가 공연하는 걸 보고 나는 감동했다. 공연이 끝나고 다영이도 감동하여 눈물을 글썽였다. 다영이는 그렇게 잘 성장하고 있었다. 사물놀이부를 지도하셨던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랴. 죄송스럽게도 현재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