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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지영 Jan 17. 2023

무제(無題)

(1999년 11월~2001년 2월의 기록)

           (사진출처 : 인터넷)

  남편이 학교일에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출근 시간은 빨라졌고, 퇴근 시간은 늦어졌다. 고3담임을 맡고부터는 더했다. 수업에 진학상담에. 게다가 그가 근무하는 인천여자고등학교는 방송통신고등학교 부설이었다. 일요일도 방통고 학생 출석수업이 있을 때는 출근해야 했고, 방학에도 보충수업이나 방통고 학생 출석수업이 있어서 출근하였다. 몇 년간 그 생활이 이어졌다. 그는 자신의 체력을 믿고 버티는 중이었다.


  그는 학교일에 올인하느라고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했다. 나라도 잘 살펴보아야 했는데, 나는 나대로 아이 둘을 돌보랴, 살림살이하랴, 학교에 출퇴근하랴, 남편의 건강을 챙기지 못했다. 감기에 걸렸거나 소화불량에 걸려도 남편은 병원에 다녀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자연 치유되기를 기다렸다. 병원에 다녀올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답답했다. 심하게 아플 때는 퇴근 후에 약국에서 약을 사 먹는 정도로 병을 가벼이 하였다. 아무리 강하다고 하여도 인간의 육체도 한계가 있는 법인데, 그걸 깨닫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리석은 나는 억지로라도 병원에 데리고 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남편이 괜찮다고 해서 그런 줄만 알았다.


  1999년 대학수능시험이 끝나고 고3담임과 동료 교사들끼리 저녁 회식이 있었다고 한다. 회식 자리에서 몸이 불편해 먼저 나와서 약국에 가서 약을 사 먹고 집에 왔는데도 상태가 좋지 않아 다음 날 동네 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고 한다. 다음 날, 나는 남편과 함께 집에서 가장 가까운 인천의료원에 갔다. 인천의료원에서는 대학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우리 부부에게 말하는 의사의 표정이 좋지가 않았다. 별 게 아닐 거라고 서로 위로하면서 인천길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니, 큰 병이라 입원해서 수술하라고 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이런 건가.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를 주문처럼 외우며 병원 복도를 걸었다.


  환자복을 입고 침대에 앉아 있는 남편이 너무 낯설었다. 나는 가슴이 조여 왔다. 이제까지 건강 하나만은 자부했고,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는, 운동선수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건장했던 남편이 환자복을 입고 있으니 낯설 수밖에.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환자복을 입은 그를 보고 화장실에 가서 눈물을 쏟아낸 후, 세안을 했다. 태연한 척 병실로 왔다. 내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남편을 위로했다.

  "여보, 괜찮을 거야. 수술하면 된다고 하잖아."

  "..."

시골에 있는 시부모님과 친정부모님, 시누이, 친정 언니 모두에게 알렸다.

  

  저녁에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왔다. 시어머니는 스님이 그러는데 더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고 한다. 나도 그러는 것이 좋을 듯도 해서 서울로 병원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병원은 삼성서울병원으로 했다. 그다음 날, 학교에서 오전 수업만 하고, 오후에 조퇴를 냈다. 지하철을 타고 일원역에서 내려 삼성서울병원으로 달려갔다. 하루 한시라도 빨리 수술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예약도 없이 전화도 없이 무작정 병원에 갔다. 진료가 끝났는지 진료대기실에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여러 진료실 문이 닫혀 있었다. 그런데 한 군데가 열려 있었다. 무조건 들어가서 우리 남편을 살려 달라고 했다. 의사는 자초지종을 듣더니 수술 예약이 다 꽉 차서 도저히 빠른 날짜가 없다고 했다. 나는 물러설 수가 없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의사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제발 수술만 하게 해 달라고 했다. 우리 딸이 세 살, 여덟 살인데, 우리 애 아빠를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우리 남편이 학교 교사인데, 빨리 수술받아야 건강해져서 학교에도 출근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하면서 애원했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기다리니 제발 사정 좀 봐달라고 했다. 수술 약속을 해주지 않으면 이 병원을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 한참 실랑이 끝에 의사는 자기 진료실에 들어가 어딘가에 전화를 하더니, 일단 입원수속을 밟으라고 했다. 약속을 받아내고, 다음 날 인천 병원에 와서 사정을 얘기하고 병원을 옮겼다.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했다. 담당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검사 결과, 대장에 종양이 보입니다. 수술을 해봐야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상태가 더 안 좋으면 인공항문을 달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인공항문이 뭔가요?"

  "대장의 일부분을 잘라내고 복벽을 통해 배변을 하게 하는 건데요. 그런데, 그런 시술을 안 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열어봐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수술진행 합시다."

   

  이렇게 해서 남편의 수술이 시작되었다. 수술실 앞에서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회복실에서 병실로 옮기는 순간에도 남편의 복부 상태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병실에 도착하지 마자 나는 남편의 복부를 들춰보았다. 휴, 다행히 인공항문은 없었다. 남편에게 이를 전하자 무척 기뻐했다.

  "됐어. 여보, 이제 살았어. 인공항문 없으니까 얼마나 다행이야."

  "그래? 다행이다."

  남편은 힘없이 말하고는 추워서 온몸을 떨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의사가 왔다. 수술하느라 열어보니 인공항문을 달 정도는 아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선생님들은 좋은 일을 많이 해서 그런지 회복이 잘 되더라고요. 걱정 말고 잘 치료받으시면 됩니다."

  하면서 의사는 우스갯소리까지 하고 나갔다. 나와 남편은 너무 좋아서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그 당시 삼성서울병원은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보호자 없는 병원이었다. 보호자가 병실에 상주하지 않고도 간호사가 모든 걸 챙겨 준다고 했다. 지금 기억으로는 수술 후, 삼일 정도만 밤에 병실에 있을 수 있고, 나머지는 밤 9시(?)만 되면 모두 병원을 나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학교는 학교대로 출근하고 오후에 병원에 와서 그를 살폈다. 밤이 되어 9시에 병원을 나오면 11시가 넘어 인천 집에 도착할 테고, 다음 날 아침에는 병원에 올 수도 없고 해서, 차라리 병원에 머물기로 작정했다. 병원에서 밤을 보낼 방법을 생각해 냈다.


  병원 내를 살펴보니, '수유실'이 있었다. 산모들이 아기에게 젖을 주는 곳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드나드는 사람이 없었다. 작은 소파가 있고, 커튼이 쳐져 있었는데 매우 아늑했다. 나는 수유실 안 쪽에 있는 소파에서 몰래 잤다. 새벽 5시(?)쯤 되면 청소하시는 분들이 왔다 갔다 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 미리 예약하러 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그러면 나는 병실에 가서 남편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학교로 출근했다. 집에는 나의 여동생이 와서 딸아이를 돌보아 주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남편은 퇴원을 했다. 두 달간의 병가가 끝나고 그는 출근을 하였다. 이제 살았구나 싶었다. 병가 후 출근 하는 날, 그는 한껏 몸치장을 했다. 외모에 관심이 없는 그가 옷을 고르고 넥타이를 고르고, 나는 그가 새 사람으로 보였다. 학교에서는 남편을 배려해서 수업량을 줄여주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 나는 그건 기억이 없다. 그렇게 몇 달을 출근하였는데, 어느 날 뜻하지 않게 그의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다시 삼성서울병원에 갔다.


  이게 웬 말인가. 검사 결과, 재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이 이런 것인가. 이제부터 그의 투병이 시작되었다. 수술 후, 그는 복부에 인공항문을 달게 되었고, 항암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의사의 지시대로 치료가 시작되었다. 몸 상태가 좋아야 항암치료를 받을 수 있는데, 오랜 투병 생활로 면역력이 떨어져서 입원치료가 불가피하였다. 의약분업으로 인해 병실 구하기가 어려웠는데,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병실을 구할 수 있었다.


  2000년인가, 그는 인천여고 근무기간을 마치고 인화여자고등학교로 전근을 갔다. 1년여간의 치료가 끝나갈 무렵에, 다시 절망이 찾아왔다. 항암주사 방사선치료 등을 다 했는데도 다른 곳에 전이되어 더 이상 항암치료나 수술이 의미가 없다고 했다. 삼성서울병원에서 퇴원을 했다. 집에서 요양하는 동안, 그는 가끔 심한 통증을 느껴서 집에서 가까운 병원의 응급실을 찾아가 모르핀 주사를 맞았다. 갑자기 찾아오는 통증을 견디기 어려워했다. 병원 침대에 누워 주사를 맞고도 약물이 효과를 나타내는 데에 걸리는 시간에도 그는 극심한 통증을 호소했다. 나는 간호사에게 말했으나 정량 외에는 더 이상은 안 된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참고 견뎌야 했다. 나는 병원에 데려가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젠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방법을 강구해도 도무지 해결 방안이 없었다.


  건장했던 그의 몸은 심하게 야위어서 딴 사람이 되었다. 파스처럼 생긴 통증 패치를 가슴에 붙이기도 하고, 진통제를 먹기도 하고, 응급실에 가서 모르핀 주사를 맞으면서 몇 날 며칠을 견디다가 다시 인천길병원에 입원했다. 입원하고 며칠이 지났는데, 그의 배가 불룩했다. 환자복을 걷어 보니, 인공항문으로 소장인지 대장인지 복부 밖으로 나와 있었다. 나와 그는 너무 놀랐다. 간호사실에 달려가서 알렸더니, 의사가 와서 밖으로 나온 장을 안으로 집어넣었다. 이럴 수가. 의사는 괜찮다고 하였다. 그럴 수 있다고 했다. 원래 상태로 돌아간 그의 배를 보고 안심했다.


  그가 입원하여 통증치료를 받으니 그는 다시 생기를 찾아갔다. 가끔은 농담도 하고 가끔은 병원 복도에서 걷기도 하고 매점도 드나들면서 병원생활을 이어갔다. 다시 평온이 찾아왔다. 나는 어느 할아버지의 웃픈 얘기까지 했다.

  "여보, 저기 문 앞에 있는 할아버지 있잖아. 밤마다 코 고는 할아버지. 아까 말이야. 그 할아버지가 우유를 달라고 해서 할머니가 우유를 드렸거든. 근데, 그 할아버지가 우유를 드시지 않고 할머니에게 타박을 하는 거야."

  "왜?"

  "글쎄, 우유 만든 날짜가 지났다는 거야. 할머니가 오늘까지니까 괜찮다고 했어."

   "그럼, 뭐가 문제야?"

  "그게, 말이지. 유효기간 날짜는 오늘까지인데, 우유 팩에 쓰여 있는 시간이 지났다고 안 드신다는 거야."

  "하하하"

  이렇게 남 얘기까지 하면서 오랜만에 여유로웠다. 삶에 대한 애착이 이런 건가, 생각했다.

 

  어느 날, 병원에 갔다. 저녁이 되어 집에 가려고 하는데, 그이는 내가 집에 가는 것을 말렸다. 평소엔 그가 잠자리에 드는 것을 보고, 나는 병원을 나오곤 했었다. 그런데 그날 밤은 남편이 나를 붙잡고 집에 가지 말라고 했다.

  "여보, 오늘은 집에 가지 마."

  "왜, 어디 안 좋아?"

  "아니, 그냥...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

  "알았어. 여보. 그렇게 할게."

   나는 그가 오랜만에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서 그러는가 보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내가 보호자용 의자에 앉자, 남편이 내 손을 잡더니 이렇게 말했다.

  "만약에 내가 잘못되면, 당신은 주변 사람 눈치 보지 말고, 당신 주관대로 살아."

  "별소리를 다 하네. 잘못되긴 왜 잘못 돼. 나으려고 병원에 왔는데. 나처럼 당신도 잘 회복될 거야."


  대화가 끝나고 몇 시간인지 몇 분이 지난 후, 그는 또 몹시 심한 통증을 호소했다. 진통제 주사를 맞고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은커녕 침대에 누워있지도 못하고 몸을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통스러워했다. 간호사실에 가서 상황을 얘기하니, 의사 한 명이 와서 남편을 진찰했다. 의사는 복도로 나오더니 간호사에게 뭔가를 말했다. 들어보니, 간호사실 앞에 있는 방으로 남편을 옮기라고 했다. 그곳은 중환자실처럼 여러 가지 의료기구들이 즐비하게 설치되어 있는 곳이었다. 느낌이 이상했다. 의사가 나를 보더니, 가족에게 연락하라고 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임종이 가까워 온다고 했다. 무서웠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털썩 주저앉았다. 입술을 깨물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시누이와 시어머니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했다.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달려왔다.


  그는 침대에 누워 있고, 이제까지 없었던 여러 링거 줄과 이름 모를 여러 줄들이 온몸 곳곳에 달렸고 남편의 손가락엔 집게도 물려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표정은 평온했다.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가 내 손을 찾았다.

  "oo이 엄마!"

  "여기 있어요. 나!"

  하며 내가 그의 손을 잡았다. 이어서 시누이가 말했다.

  "오빠는 새언니가 그렇게 좋아?"

  "그-럼, 이쁘지."

  그러다가 남편은 매우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한참 동안 그는 눈도 뜨지 않고 호흡만 이어갔다. 그의 입술이 말라갔다. 시어머니는 물수건으로 남편의 입술을 적셔주었다.

  "oo아, 걱정 말고 가. 여기 걱정은 하지 마라. 마음 편히 가라. 거기서는 아프지 않잖아. 흐흐흑"

  그 소리가 끝나자, 그의 마지막 숨이 멎었다. 오르락내리락하던 모니터의 그래프가 일직선이 되었다.

  삐익 삐익 삐이이--------

  잠시 후, 의사가 와서 사망 시각을 말했다. 투병 기간도 길고 고통의 시간도 길었지만, 그가 이승을 떠나는 것은 순간이었다. 2001년 2월, 남편은 44년의 짧은 생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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