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사랑과 이해가 우선되어야

by 강지영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 나오는 말이다. 하긴 고통을 많이 겪었다고 공감 능력이 높은 것도 아니다. 고통을 겪는다거나 안다는 것이 공감 능력에 어느 정도 도움을 줄지언정 정비례 관계는 아니다. 공감은 ‘인간 이해 능력’에 ‘인간에 대한 애정’이 보태져야 한다. 너의 마음을 이해해, 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고통의 인과관계를 이해한다는 것에 그칠 공산이 크다. 상대방의 감정을 알아챈다면 좀 더 나은 정도, 거기까지일 경우가 많다.


현대인이 많이 느낀다는 우울증, 소외감, 불안감은 무엇을 말하는가. 높아지는 자살률의 원인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여러 가지 해석이 있겠지만, 공감의 부재도 큰 원인이 될 것이다. 바로, 자신의 고통을 남들이 알아주지 못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얘기해봐도 소용없다고 받아들인다. 남들은 다 행복한데 자신만이 불행하다고 느낀다. 과거를 돌아보면 아물지 않은 상처투성이고, 미래를 보면 희망도 없다. 누구에게도 공감을 받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해한다고 말해도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공감을 느끼지 못하면 진정한 공감이 성립된 것이 아니다. ‘마음에 없는 말’ 뿐이다.


공감해 주는 사람을 찾아 나선다. 모두 다 공감에 목마른 사람들이다. 라디오 방송국에 사연을 보낸다. 유튜브에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다양한 플랫폼에 글을 올린다. 각종 매체에 자신을 알리고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공감을 받고 싶어 한다. 그들이 나를 얼마나 안다고 그렇게 할까. 모르는 사람에게 ‘사랑합니다. 고객님!’ 소리를 듣는다. 우리는 모두 물질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마저 돈을 주고 산다. 고객은 돈이 없으면 홀대를 당한다. 그래서 가짜 사랑이라도 얻으려고 끊임없이 돈을 좇는다. 점점 살기가 팍팍해진다. 이미 내 앞에 닥쳐진 현실을 견디며 사느라 바쁘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느낄 시간이 없다. 치열한 경쟁과 분 단위의 바쁜 시간 속에 사는 현대인들은 전후좌우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


언제부터인가, 학교 현장에는 소풍 대신 현장학습, 체험학습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농부가 다 가꾸어 놓은 밭에 가서 고구마를 캔다고 농부의 마음을 알까. 농부가 다 가꾸어 놓은 배나무에서 배를 딴다고 농부의 마음을 알겠는가 말이다. ‘장애인 공감하기’라는 시간에 눈가리개를 하고 친구의 목소리 안내를 받으며 몇 걸음 걸어본다고 장애인의 불편을 공감할 수 있을까.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그 효과는 믿을 수가 없다. 제대로 된 공감 능력을 키워가기 위해서는 인간 이해와 인간애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공감 능력을 키우는 것은 이제 생존의 과제가 되었다.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절실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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