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이의 행복

by 강지영

코로나19가 오기 몇 해 전, 나는 소설 창작 강의를 들었다. 소설을 쓰기 위함은 아니었다. 소설이 어떻게 써지는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고 싶었다. 그것을 알면 소설을 더 잘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운영하는 강좌였다. 강사는 <사람의 신화>, <봉섭이 가라사대> 등의 소설을 쓴 손홍규 작가였다. 내 기억이 맞다면, 강의는 소설 이론부터 시작되었다. 소설가의 강의는 처음 들었는데, 여러 가지 소설을 예로 들면서 하는 강의라서 흥미롭게 들었다. 문제는 강의 중반쯤에 들어섰을 때였다. 소설 한 편씩을 쓰는 것이 과제로 주어졌다. 원고지 70장~80장 정도로 기억된다. 소설을 다 쓴 다음에 합평까지 한다는 거였다. 앗, 소설을 쓰라니! 나는 당황하였다. 내가 소설을 쓴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나는 소설을 어떻게 쓸지 숙고에 들어갔다. 숙고라기보다는 방황에 가까웠다. 어떤 이야기를 쓸지, 어떤 인물을 설정할지, 어떤 사건, 어떤 배경을 만들지, 어려운 과제였다. 눈만 뜨면 그 생각뿐이었다. 밥 먹으면서도 소설 생각, 설거지하면서도 소설 생각, 길을 걸으면서도 소설 생각, 심지어는 식구들과 이야기할 때도 소설 생각뿐이었다. 생활이 되지 않았다. 근무 중에도 소설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의식이 있는 시간에는 온통 소설 생각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소설 한 편을 썼다. 얼마나 뿌듯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나 자신이 얼마나 대견한지 모른다. 창작의 기쁨, 창조의 기쁨! 소설가도 이럴까. 그 후부터 책장에 꽂혀있는 소설책들이 위대해 보인다.


지금 내가 소설 창작 첫 경험이 떠오른 이유는 오늘 아침에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읽으면서다. 구보는 소설가다. 스물여섯 살의 구보는 취업도 결혼도 하지 않아, 늙고 쇠약한 어머니의 걱정을 들으며 지낸다. 하루는 구보가 집을 나와 천변을 걷는다. 한낮의 거리 위에서 격렬한 두통을 느낀다. 스스로 신경 쇠약이라고 진단한다. 거리에서 만난 낯선 젊은 내외가 아이와 함께 행복할 거라고 어림하며, '자기는 어디 가 행복을 찾을까 생각한다.' 외로움과 애달픔을 맛보다가 전차에 오른다. 전차 안에서 작년 여름에 단 한 번 만난 여자를 보고 모른 체한다. 또 구보의 친구 누이에게 짝사랑을 느낀 적이 있는데, 훗날 결혼해서 생활하는 것을 보고 짝사랑으로 마무리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구보 자신은 여자와 사랑을 한다는 것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지친 구보는 다방에 들어간다. 팔뚝시계를 찼던 소녀를 떠올리며 금전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약간의 금전이 가져다줄 수는 만족은 애달프다고 느낀다. 물욕을 채운다 해도 행복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구보는 거리에서 다방에서 여러 사람을 만난다. 그러면서 구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섭의 번거로움을 새삼스러이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이 가장 모이는 경성역에서도 사람 간의 온정을 찾지 못한다. 군중 속의 고독. 구보는 고독하다. 시인이자 신문기자인 친구를 만난다. 먹고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친구다. 그의 삶에서도 행복을 찾지 못한다. 그렇게 거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구보는 노모가 있는 집으로 들어가며 소설은 끝난다. 집으로 돌아간 구보는 무엇을 했을까. 아마도 소설을 썼으리라. 소설을 쓰면서 구보는 행복했으리라. 구보의 행복은 밖에 있지 않았다. 구보의 행복은 구보의 내면에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오늘 하루는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를 생각하며 소설가의 행복이 무엇인지, 글 쓰는 사람의 행복이 무엇인지 찾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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