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들의 슬픔

by 강지영

나에게는 각별한 취미가 있다. 소설을 읽고 나서 영화를 본다. 원작이 있는 영화라면 힘써 소설을 찾아 읽는다.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 속의 배경이나 인물에 대하여 상상을 한다. 2~3일간 그 상상 속에 지낸다. 그러고 나서 영화를 본다. 내가 상상한 것과 영화의 장면을 비교해 보면, 소설 속 내용들이 오랫동안 기억된다. 지금 타이핑을 하면서 떠오른 것은, <안나 카레니나>, <고요한 돈강>, <채털리 부인의 사랑>, <보바리 부인>, <제인 에어>, <댈러웨이 부인>, <남한산성>, <밀양>(이청준의 '벌레 이야기'가 원작) 등등.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영화를 보았다. 지금도 기억되는 것이 안나(소피 마르소 분)와 브론스키(숀빈 분)가 처음 만나 나누던 사랑의 눈빛. 안나와 브론스키가 춤을 추던 장면, 레빈이 농장에서 일하던 장면, 안나와 브론스키가 호숫가에서 산책하는 장면. 안나가 생을 마감하려고 찾아갔던 기찻길 등이 생각난다.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을 읽고 보았던 영화도 있다. 돈강의 풍경, 강가의 오두막집들, 악시녀가 말을 타고 가다가 연인과 함께 총 맞아 죽는 장면, 돈강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여인, 말을 타고 전쟁하는 젊은이들의 처절한 모습, 가족 대부분이 떠나고 쓸쓸히 고향을 찾은 남자가 텅 빈 집 근처에서 심심하게 놀고 있는 아들을 만나는 장면을 추억한다.


예로 든 위 두 가지 영화는 원작을 그대로 살렸다. 오늘 본 영화는 조금 다르다. 최근 개봉했던, 임현묵 감독의 <소설가 구보의 하루>다. 1930년대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문학과지성사, 2021)을 각색했다. 영화는 1930년대 '소설가 구보씨'를, 약 1세기를 뛰어넘어 '소설가 구보'로 소환한다. 책이 1930년대 식민지가 된 나라에서 살았던 소설가, 지식인, 젊은이들의 고뇌를 담았다면, 영화는 21세기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잠식한 대한민국의 소설가, 연극인, 사진가 등의 젊은 예술인들의 팍팍한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았다. 형태는 달라도 주인공의 내면은 닮았다. 영화 내내 등장인물들은 지쳐 있다. 희망과 온정은 간데 없이 회색빛 도시는 흑백영화로 변주된다. 순수문학을 원고지에 쓰는 구보는 변화무쌍한 현대에서 독보적이다. '순수'와 '원고지'는 구보만의 자존심일지도 모른다. 순수문학이 쇠락해 가는 현대에 구보는 타협하지 않는다. 그것은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 생활에 얽매였거나 물질에 탐닉하는 주변인들은 구보를 비아냥댄다. 그럼에도 구보는 무표정하다. 너무나 익숙한 탓일까.


그렇게 구보는 하룻 동안 도심을 산책한다. 21세기 젊은이답게 그에게서 휴대전화는 떠나질 않는다. 그와 다른 사람의 연결 고리는 휴대전화. 어디에서도 구보는 소설을 읽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그러던 중 구보는 구원자와도 같은 독자를 만난다. 다행이다. 영화 속 연극배우(김새벽 분)는 구보의 글 중 어느 한 대목을 외울 정도다. 자신의 글을 기억하고 있는 독자와의 만남, 이것이 작가로서의 가장 큰 기쁨이 아닐까.

"익숙하지 않은 것이 설렘과 기대를 준다. 이미 익숙해져 버렸다면 그 익숙함을 지우려 노력해야 한다. 단면을 스치듯 보며 순간의 감각으로 새로움을 느껴야 한다."


구보는 연극배우의 일성에서 '새로운 감각'을 느꼈는지, 다가올 아침을 기대하며 엷은 미소를 짓는다. 나는 구보가 순수문학에 다시 도전할 용기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그다음 롱테이크 장면에서 나의 감동은 사라졌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만나자던 여자 친구의 휴대전화 메시지를 떠올리고 구보는 공원에 들어선다. 그 순간, 구보의 어깨를 강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검은색 코트의 긴 머리 여자가 있다. 구보는 그 여자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잠시 후 고개를 숙이고 체념 후의 짧은 쓴웃음을 짓는다. 고개를 들고는 한숨을 쉰다. 곧바로, 구보는 다른 사람의 자서전 집필을 제안했던 출판인에게 휴대전화 메시지를 보낸다. 그 자서전을 자기가 쓰겠다는. 영화에서 나는 현실에 타협하는 현대 작가의 비애를 보았다.


삶과 예술! 모두 다 중요한 일이다. 삶이 있어야 예술도 있음은 당연한 이치. 그러나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데 얼마만큼의 물질이 필요한 것인지. 얼마만큼의 물질이 있어야 인간으로서 대접해 주는지. 사람의 가치를 물질의 소유로 매김하는 이 현실이 참 혹독하다. 이런 속에서 현대의 '구보'들이 작가로서의 자존감을 지켜가며 살아갈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늘 하루는 그걸 생각하는 시간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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