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한 퇴임사

by 강지영

안녕하세요? 오늘 퇴임하는 강지영입니다.(꾸벅)

이렇게 성대한 퇴임식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퇴임식을 준비해 주신 교장 선생님, 교감 선생님, 그리고 친목회 회장님과 총무님, 그리고 여러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를 알고 있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고맙습니다.(꾸벅)


지난주 어느 날 저녁에 최 부장 선생님으로부터 퇴임식에 쓸 사진을 달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최근에 사진을 찍은 게 없어서 난감했습니다. 책장 구석에 꽂혀 있던 앨범을 꺼냈습니다. 뭐에 그리 바쁜지 그간 앨범을 펼치지 못하고 긴 세월을 보냈습니다. 오랜만에 꺼내 보니 앨범 케이스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습니다. 조심조심 먼지를 떨어내고 앨범을 펼쳤습니다. 가장 예쁘게 나왔던 사진만 골랐습니다. 그게 바로 전에 영상으로 보셨던 것들입니다.(스크린을 가리키며) 그중에서 두 가지 사진에 대하여 덧붙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 번째 보여드린 흑백 사진은 제가 가지고 있는 사진 중에서 가장 오래된 사진입니다. 제가 다섯 살 때 큰언니랑 찍은 사진입니다. 큰언니는 저보다 열 살 위인데, 저를 업어서 키웠다고 합니다. 농사일에 바쁜 엄마 대신에 언니가 돌보았던 것이지요. 영상에는 잘 나와 있지 않지만 제가 신은 신발은 검정 고무신입니다. 1968년입니다. 또 하나 사진은 제가 신혼여행을 갔을 때 찍은 것입니다. 바닷가에서 저를 업고 있는 잘 생긴 남자는 지금은 사진으로밖에는 볼 수가 없답니다. 그 사람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이런저런 사진을 보냈는데, 최 부장님이 이렇게 멋진 영상을 만들어주셨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꾸벅)


여러분, 제가 지금 반지를 끼고 있습니다.(반지 낀 왼 손을 들어 보이며) 중요한 행사에 끼는 반지입니다. 제가 긴장될 때나 어려움이 있을 때 이 반지를 끼면 뭔가 큰 힘이 된답니다. 바로 돌아가신 저의 어머니가 물려주신 반지입니다. 큰언니가 엄마 회갑 때 해드린 반지입니다. 어머니도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만 꼈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아끼고 아끼다가 저에게 물려주셨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딸 넷을 두었는데, 셋째 딸인 저의 손가락에 잘 맞았거든요.(웃음)


저의 어머니께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엄마, 나 이젠 학교 그만두려고 해”(반지를 보며)

“그려, 잘했다. 잘했어.”(우리 엄마 목소리로)


퇴임을 하는 마당에 제가 어떻게 교직에 들어왔는지 사연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저는 가정형편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농부였습니다. 작은 논 하나, 작은 밭 하나. 그렇지만 마당은 꽤 넓었습니다. 아버지가 꽃을 좋아하셔서 안마당에는 꽃밭도 있었습니다. 겨울철 빼놓고는 거의 꽃이 피고 지고 했지요. 뒷집에 산수유가 피고 질 때쯤이면 우리 집 꽃밭에서는 진달래가 피었습니다. 진달래가 질 때쯤이면 영산홍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영산홍이 지고 나면 채송화, 상사초, 백합, 장미, 백일홍, 분꽃, 접시꽃, 달리아 등등 순서를 정할 수 없이 꽃이 피고 졌습니다. 가을에는 과꽃, 국화 등등. 그야말로 우리 집은 꽃잔치였습니다. 부지런한 아버지는 농사일도 바쁠 텐데, 어떻게 꽃밭까지 가꾸셨는지 모릅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공부를 꽤 잘했거든요.(웃음) 반장, 부반장은 맡아놓고 했고요. 저는 제가 잘 나서 그런 줄 알았어요. 근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궁금하시죠? (잠시 생각할 시간을 제공) 그 연유는 이렇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출생신고를 늦게 한 거였어요. 왜냐하면 그 당시 작은아버지가 면사무소에 근무했는데, 아버지는 작은 아버지가 출생신고를 할 걸로 알고 있었던 거지요. 시골에서는 면사무소에서 출생신고를 하잖아요. 그런데, 작은 아버지도 차일피일 미루다가 잊은 거죠. 저는 유치원 교육도 못 받고, 아홉 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 시절에는 유치원 교육이 거의 없었습니다. 내 이름 석 자만 쓸 줄 안 상태에서 입학을 했습니다. 기역니은, 1, 2, 3, 4부터 배운 겁니다. 우리 어머니 말대로, 머리가 여물어서 학교에 들어갔으니 얼마나 공부가 잘 되었겠습니까. 텅 빈 머릿속에 공부하는 내용이 쏙쏙 들어왔던 것이지요.


그러면 저는 아홉 살이 될 때까지 뭐했냐고요? 날마다 들로 산으로 동네 애들하고 뛰어다니며 논 거죠. 얼마나 개구쟁이였는지 제 무르팍에는 어린 시절 다친 상처가 지금도 두어 개 남아 있답니다. 진달래 따 먹고, 아카시아꽃 따 먹고, 딸기 서리해 먹고, 참외 서리도 하고... 논에 가서 우렁이 잡고, 냇가에 가서 다슬기 잡고, 물놀이하고요. 동네 오빠들, 언니들, 친구들하고 참 많이도 뛰어다니며 놀았지요. 아름다운 시절이었습니다.


중학교 때, 특별한 교장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장각진 교장 선생님이셨습니다. 그 교장 선생님은 시골 중학생의 대전 시내 고교 입시를 위해서 아주 특별한 정책을 펼치셨습니다. 학생들의 학력 신장을 위해 거의 스파르타 식으로 공부를 시켰습니다. 방과 후에 집에 가서 저녁밥을 먹고 학교에 와서 강당에 모여 특강을 받습니다. 이어지는 야간 자율학습. 잠은 교실에서 잤습니다. 교실 한 귀퉁이에는 보자기로 싼 이불 보따리가 있었습니다. 물론 추운 겨울에는 하지 못했죠. 교육청에서 장학사가 온다는 소식이 있을 때면 이불 보따리를 학교 앞 문구점 안방에 숨겨 놓았고요. 근데, 저는 그게 참 재미있었습니다. 공부도 재미있고, 친구들이랑 교실 바닥에서 자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저는 공부가 체질에 잘 맞았던 것 같습니다.(웃음)


대전으로 고등학교를 갔습니다. 꿈이 무엇인지, 장래에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모른 채, 성적이 좋으니까 인문계 고교를 간 거죠. 낯선 도시로 통학을 하였습니다. 낯선 도시, 시골 출신 소녀가 얼마나 어리바리했겠어요. 다행스럽게도 고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의 고향이 제 고향과 이웃하고 있었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촌놈, 촌놈 하면서도 저에게 얼마나 다정하게 해 주셨는지 모릅니다. 담임 선생님이 좋아서 공부를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촌놈의 기가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웃음) 그다음 고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도 시골 출신 총각 선생님이셨는데, 이분도 저에게는 은인이었습니다. 원거리 통학생인 저는 담임 선생님께 여러 모로 의지를 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담임 선생님이 결혼할 때, 우리 반 친구들은 모두 장미 한 송이씩을 들고 결혼식장에 두 줄로 입장하여 한 줄은 신부에게, 다른 한 줄은 신랑인 담임 선생님에게 장미꽃을 드렸지요. 저는 담임 선생님께 장미를 드리고 싶어서 눈치를 보다가 줄을 바꾸기도 했답니다.(웃음)


고3이 될 때, 또 한 번 중대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입학한 대전성모여자고등학교는 인문계고입니다. 그렇지만 대학 입학이 어려운 학생을 위해서 ‘취업반’이 있었습니다. 저는 가정형편을 생각해서 취업반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취업반에서 타자 주산 부기 등의 취업준비교육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높은 등록금 때문에 저는 대학 갈 만한 용기가 나지 않았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취업반을 신청한 학생이 많지 않아 취업반 학급편성이 안되었습니다. 자연스레 저도 진학반이 된 거지요. 이런 게 운명 아니겠습니까. 그래, 좋다, 한 번 해 보는 거야. 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겨울에는 손이 시려 글씨 쓰기가 어려웠습니다. 장갑을 잘랐습니다. 손톱 부분을 자른 장갑을 끼고 책장을 넘기고 펜을 잡고 공부했습니다. 발이 시려서 두 발을 목도리로 꽁꽁 싸매고 공부했습니다. 이제 대학입시입니다. 고3 담임 선생님은 저에게 교대를 추천해 주셨습니다.

“공부한 거 아깝지 않아? 대학 가야지. 음, 어디가 등록금이 가장 쌀까? 그래 좋다, 교대 가자.”

저는 주저 없이 바로 원서를 썼습니다.


그렇게 교대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부모님의 노동은 늘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해 오던 대로 집안 농사를 지으셨고, 어머니는 틈나는 대로 남의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 때문에 어머니의 고된 일이 시작된 것이지요. 이웃집 밭에서 풀 뽑기, 모내기, 대학 식당에서 설거지하기, 겨울철 비닐하우스 속에서 딸기 따기 등의 일을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일을 마치고 집에 올 때는 딸기밭 주인집에서 딸기를 얻어오기도 했습니다. 상품성이 떨어지는 딸기를 가져왔는데, 무른 딸기를 물에 넣으면 물이 붉게 물들고 딸기 향이 더 퍼졌습니다. 지금도 저는 딸기를 보면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딸기향은 어머니 향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무른 딸기가 아닌 특상품 딸기를 사드릴 수 있는데, 이제는 부모님이 안 계시네요. 인간사가 다 이렇습니다.


저도 집에서 공부만 할 수 없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당구장에서 카운터 보기, 빵집에서 서빙하기,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기, 사탕공장에서 일하기, 등의 알바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과외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학생들의 알바는 주로 그런 일들이었습니다. 남자 대학생은 공사장에서 벽돌 나르기 등의 일을 한다고도 했습니다. 다행히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졸업하자마자 1차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때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제가 교사가 된 데에는 여러 선생님의 가르침과 부모님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여자가 대학을 다닌 사람은 나와 8촌 언니 둘 뿐이었습니다. 8촌 언니네는 머슴을 두고 살 정도로 갑부였습니다. 저희 집처럼 가난한 집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된 것에 대하여 동네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교직 생활이 35년이 지났습니다. 어렵고 힘든 시기, 부모 형제의 사랑은 늘 큰 힘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힘들 때마다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무언가 결정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답을 찾아 헤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엄마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곰곰이 떠올려 봅니다.


요즘 행복이라는 말을 참 많이 합니다. 행복해! 행복하세요! 이 말요. 아, 궁금해서 네이버를 찾아보았습니다. 행복이란, 영어의 happy를 일본에서 행복으로 번역한 거라네요. 해피, 행복.(웃음) 아무튼 요즘 사람들이 행복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요. 두산동아 국어사전에는 ‘마음에 차지 않거나 모자라는 것이 없어 기쁘고 넉넉하고 푸근함.’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어쩐지 뜬구름 잡는 얘기 같습니다. 마음에 와닿지 않습니다. 행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무어라고 하시겠습니까?(잠시 시간 제공) 그게 저는 궁금했습니다. 지식이 짧아 저 나름대로는 정의 내리지 못했는데, 언젠가 시집을 읽다가 제가 찾던 ‘행복’을 만났습니다.

“행복, 바로 이거야.”하는 시를 찾았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시집 <이야기가 있는 시집>(푸른길, 2013)은 다음과 같이 행복을 담고 있습니다.(시집을 들어 보임)

행복

나태주

저녁때

돌아갈 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맞습니다. 나는 행복에 대한 여러 철학자나 문학가들이 말하는 것 중에서 이게 가장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경제적) 안정, 추억, 예술. 이 시에서 말하는 행복의 세 가지를 기억하기 위해 저는 이렇게 외웠습니다. 집사람노래한다.(웃음) 이제 저는 완전한 ‘집사람’이 되어 가정으로 돌아갑니다. 그곳에서 열심히 노래하려고 합니다. 행복을 가꾸려고 합니다. 모쪼록 여러분도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완전한 자유인이 됩니다. 너무 기쁩니다. 너무 설렙니다.


마지막으로 코로나 위기 상황입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어서 빨리 코로나가 물러가고 우리 사는 세상에 건강과 평화와 행복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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