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나는 일본 작가가 쓴 책은 읽지 않았다.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등의 숱한 우리나라 침탈에 대하여 머릿속 깊이 새겨진 혐일 감정 때문일까. 지독한 편견 속에 갇혀 있었다. 이제는 나의 독서의 장을 확장해 보려 한다. 그래서 읽게 된 책이 있다. 바로 <여치>다. 이 작품은 다자이 오사무의 <디 에센셜 다자이 오사무>(민음사, 2021)에 수록되어 있다. 읽기를 잘한 것 같다.
1909년에 태어나 1948년에 투신으로 생을 마감한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여치>. <여치>는 1940년 발표되었다. 작품으로 수입이 생기자 원고료에 대한 자신의 욕심을 경계하는 의미에서 썼다고 한다. 마음속 속물근성을 훈계한 것이라고도 했다.
<여치>의 화자는 화가의 아내이다. 툇마루에 아무도 앉아 있지 않고 하얀 방석만 하나 놓여 있는 그의 작품을 보고 여자는 화가에게 반해버린다. 결혼을 결심한다. 무명의 화가, 가난한 화가에 여자의 부모는 결혼을 반대한다. 화가를 만나본 여자는 그의 과묵함과 결핍에 대하여 매력을 느낀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다. 화가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점점 부유해진다. 부유해지면 부유해질수록 화가는 세상에 타협하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돈이 될만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과묵했던 화가는 점점 말이 많아진다. 험담하는 말, 아부하는 말들이 넘쳐난다. 아내는 그런 남편이 싫어진다. 이런 남편을 본 아내의 생각은 이렇다.
'돈이 정말로 깡그리 없어졌을 때는 제 힘을 있는 한껏 시험해 볼 수 있어서 아주 보람이 있었습니다. 그게, 돈이 없을 때의 식사일수록 즐겁고 맛있거든요. 잇달아 제가 맛난 요리를 발명했잖아요? 지금은 안돼요. 뭐든지 갖고 싶은 걸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아무런 공상도 솟아나지 않아요. 시장으로 나가 봐도 저는, 허무합니다. 다른 아주머니들이 사는 물건을, 저도 똑같이 사서 돌아올 뿐입니다. 당신이 갑자기 훌륭해져서 그 요도바시 아파트를 떠나, 이 미타카초 집에서 살게 된 이후로는 즐거운 일이 하나도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제가 솜씨를 발휘할 곳이 없어졌습니다. 당신은 갑자기 말솜씨도 능숙해져서 저를 한층 아껴 주셨지만, 저는 자신이 어쩐지 집고양이처럼 여겨져, 언제나 곤혹스러웠습니다. 저는 당신을, 이 세상에서 입신하실 분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죽을 때까지 가난하게 자기 좋을 대로 그림만 그리고, 세상 사람 모두에게 조소당하고, 그럼에도 태연스레 아무한테도 머리를 숙이지 않고 이따금 좋아하는 술을 마시고 평생, 속세에 더럽혀지지 않고 살아갈 분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또 아내는 이런 생각도 한다.
"어째서 그토록, 돈에 구애되는지요! 좋은 그림만 그리다 보면, 생활은 저절로 어떻게든 꾸려지는 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좋은 일을 하고,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채로 가난하게,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만큼 즐거운 건 없습니다. 저는 돈이고 뭐고 원하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멀고도 큰 프라이드를 지니고, 살그머니 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전짓불을 끄고 혼자 똑바로 누워 있자니, 등줄기 아래서 귀뚜라미가 열심히 울고 있었습니다. 마루 밑에서 울고 있는 거지만, 그게 마침 제 등줄기 바로 아래쯤에서 울고 있는 탓에 어쩐지 제 등뼈 안에서 작은 여치가 울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이 자그마한, 희미한 소리를 평생 잊지 않고, 등뼈에 품고 살아가자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에선 분명 당신이 옳고, 저야말로 틀렸을 거라는 생각도 합니다만, 저는 어디가 어떻게 틀렸는지, 암만해도 모르겠습니다.'
아, 이제야 작품의 제목이 '여치'인지 알 것 같다. 여치의 울음소리는 바로 작가 자신의 내면에서 울리고 있는, 자신을 일깨우는 그런 소리일 게다. 다자이 오사무가 자신에게 하는 작가로서의 자긍심에 대하여 말하는 것으로 읽힌다. 작가도 사람인지라 먹고살아야 하겠지만 명성, 권력, 물질에 예속되는 것을 경계하자는 결의로 생각된다.
물질만능주의 시대가 된 지가 오래되었다. 소비가 미덕인 시대가 왔다. 가난이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가난은 연민과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시대에 <여치> 속 화가의 아내처럼 살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더라도 명성, 권력, 물질에 예속될 때, 인간으로서의 자긍심, 예술가로서의 자유 등은 점점 멀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으로서의 삶의 질은 무엇으로 이루어질까. 나는 <여치> 속 아내의 '삶의 가치관', '삶의 철학'을 '귀감'으로 삼아 마음속 깊이 새겨 넣으려 한다. 여치의 울음이 지속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