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자격이란 게 있는 걸까

by 강지영

오늘 낮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평온한 하루였다. 집에만 있기 뭣해서 동생과 함께 공원에 갔다. 한낮인데도 영하 1도의 날씨였다. 바람이 불어 두 번이나 모자가 날아가 주워야 할 정도였다. 공원의 나무는 흔들리지 않았다. 바람은 겨울나무를 흔들지 못했다. 바람을 맞이할 잎이 나지 않았으니까. 체감온도는 더 낮았으리라. 그럼에도 연못의 물은 녹고 있었다. 얇은 얼음 몇 개가 물 위에 동동 떠 있었다. 10여분을 걸으니 차가웠던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공원을 거의 한 바퀴 돌다 보니 한옥에 다다랐다. 대문이 활짝 열려 있어서 안을 들여다보니, 여성 노인 대여섯 명이 마루에 앉아 있다. 서로 모르는 사람인지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햇볕의 따사로움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어렸을 적 나는 친구들과 함께 이웃집 담벼락에 기대서서 수다를 떨며 놀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집에 와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었다. 두 번째다. 왜 '인간실격'인가. '인간의 자격'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소설 속 '나'는 세상에 속하려고 애썼다. 친구, 여자, 가족과 어우러지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속고 속이는 세상에 대한 환멸을 느낀다. 자기 자신도 가면을 쓴 채 살아가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 타인도 다양한 가면을 쓰고 삶을 견뎌가고 있음을 이해한다. 그러니 남을 탓할 수도 없다. 누구나 그렇게 삶을 지탱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소설 속 나는 나약하다. 어느 누구에게도 자기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아파할까 봐 반항심도 나타내지 못한다. 아니 소설 속 나는 반항심조차 생기지 않는다. 정신도 육체도 허약하니까.


소설 속 나는 죽고 싶다. 다른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그 사람이 너무 행복할 것이기 때문에. 소설 속 나는 늘 죽음을 생각한다. 인생무상을 느꼈다고나 할까. 지루한 삶, 소설 속 나는 식욕도 성욕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창녀에게서는 포근한 잠, 깊은 숙면을 바랄 뿐이다. 급기야 소설 속 나는 알코올, 수면제(디알), 모르핀 등에 중독되어 간다. 소설 속 나는 스스로 광인, 폐인이라고 여긴다. 이제 자신은 인간으로서 '실격'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소설 속 나는 바로 작가 자신이다. 소설 속 나는 작가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은 작가가 추구했던 순수와 아름다움, 자유가 '인간성 상실의 시대' 속에서 어떻게 폄하되고 무시되는지 신랄하게 보여준다.


다자이 오사무, 이 일본 작가는 1909년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다자이는 자신의 집안이 고리대금업으로 부자가 된 신흥 졸부라는 사실에 평생 동안 부끄러움을 느꼈다. 다자이는 다섯 번째 자살 기도로 1948년 연인과 함께 생을 마감한다. 다자이가 살았던 일본의 상황을 상상해 보자. 제국주의 일본이 세계 제패를 꿈꾸고 세계대전을 벌이던 시기였다. 1945년 패망 후 일본 사회에 특히 일본 젊은이에게 불어닥친 심리적 불안과 우울에 대해 생각한다. 일본 사람들뿐인가. 더 심하게는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의 상황을 떠올려보면 슬픔은 더해진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혼란한 사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신과 육체. 그런 속에서는 특히 강한 육체를 가진 인간이 그나마 살아남기가 수월할 것이다. 다자이는 육체와 정신 모두 약했다. 다자이는 자살 시도, 복막염으로 인한 진통제 파비날 중독, 정신병원 입원 등을 경험하게 된다.


<인간실격>이 발표된 지 70여 년이 넘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비춰보자. 인간의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재단하는 일이 허다하다. 가난한 사람, 학력이 낮은 사람, 몸이나 마음의 병을 앓는 사람, 늙은 사람, 등을 '루저(loser)'라고 무시한다. 루저를 실격된 인간으로 대체해도 무방할 듯하다. 슬픈 사회에 살고 있다. 루저가 되지 않기 위해서, 루저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은 악착같이 돈을 모은다. 권력에 혈안이 된다. 영화 <오징어 게임> 중, 한 대사가 떠오른다. '이러다 다 죽어.'


그러고 보니, 오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게 아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다. <인간실격>을 두 번째 읽은 나는 분명히 어제의 나와 다르다. 확실히 다르다. 그럼, 오늘 내 안에서는 마음의 파도가 크게 일어났으리라. 과연 인간의 자격이란 게 있는 걸까. 인간의 자격을 결정짓는 잣대가 무어란 말인가. 인간은 말 그대로 인간일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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