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은. 어젯밤에는 박빙의 투표율에 잠이 오지 않았다. 오늘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 같은 초조감과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들의 반은 슬펐을 테고, 반은 웃었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조금 아팠다. 귀찮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딸아이 출근길 도우미' 역할을 패스할 수는 없었다. 세면을 하니, 한결 기분이 상쾌했다. 계란을 삶아 썰어 담았다. 사과 한 개를 한 입 크기로 조각내어 플라스틱 통에 담았다. 늘 하던 대로다. 차 안에서 계란과 사과를 먹는 것을 보면 얼마나 뿌듯한지 모른다. 큰딸을 지하철역까지 태워다 준다. 어떤 이는 아이들을 너무 곱게 키운다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아이는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도 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하루를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시작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는 그렇게 한다. 어떻게 하는 게 부모로서 잘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저 내가 힘이 닿는 한, 내가 할 수 있는 한 도와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사는 방식은 제각각이고 생각은 다를 수 있으니까 섭섭하게 듣지 않기로 했다.
전기밥솥에 쌀을 넣고 취사 버튼을 눌렀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지하는 후보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전화를 하려니 잠시 어색했다. 용기를 내어 내가 먼저 말을 했다.
"00야, 잘 잤어?"
"응, 지영아, 어젯밤 지지율 격차가 0.8프로 계속될 때 안되는구나 하고 잤어. 넌?"
"난 끝까지 다 보았어. 피곤한데 잠이 안 오네."
"우리 나이에는 잠을 못 자면 큰일 나. 이따가 꼭 자야 돼. 근데 이번 선거에서는 어떤 후보자도 교육에 대해서 얘기하지는 않은 것 같아."
"맞아. 어떤 후보도 교육에 대해서는 특별한 공약을 하지 않은 것 같아. 정치에 철학이 없어서 그래. 사회, 문화, 교육이 얼마나 중요하냐. 그저 먹고사는 문제에 급급하느라고 말이지. 선진국이 되었다고는 해도 정치 분야는 아직 멀었어."
이런저런 선거 얘기를 하다 보니, 전기밥솥이 밥을 다 지어놓았다. 나이 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는 항간의 말이 생각났다. 딸, 돈, 친구. 그 친구와 얘기를 하면 큰 문제도 간단한 문제가 된다. 재미있다. 그래서 답답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친구에게 전화를 하게 된다. 너무 멀리 살기 때문에 만나기는 힘들다.
해가 많이 기울어 가는 시간, 지난번에 대출받은 책을 반납하러 도서관으로 간다. 내가 이용하는 도서관은 고등학교 정문 앞에 있다. 하교하는 학생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슬쩍 가까이 가서 들어 보았다.
"야, 우리 담탱이 말이야. 내가 쫌 졸았다고 그럴 수 있냐. 봄인데 잠이 오는 거 당연한 거 아냐?"
"그게 존 거냐? 잔 거지. 또, 한 번 깨웠으면 그만 자야지. 자꾸 자니까 그렇지."
"아, 씨팔. 존나 졸려."
욕설까지 섞어 말하는데도 나는 거슬리지 않았다. 그 학생이 잠과 사투를 벌이는 것을 상상해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오는 길에 과일 채소 가게에서 딸기 한 팩과 시금치 한 단을 사 가지고 집에 왔다. 딸기를 얇게 썰어서 떠먹는 요구르트에 섞어 먹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무언가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무얼 할까. 맞다. 수선집에 맡겨 달라는 작은딸 바지를 한 번 볼까. 소파에 걸쳐있는 바지를 보니, 밑단에 문제가 생겼다. 바지 밑단 감친 부분이 타져 있었다. 소파에 앉아 밑단을 쏭당쏭당 꿰맸다. 겉에는 꿰맨 자국이 전혀 표시 나지 않아, 내가 봐도 감쪽같다. 온라인 강의를 듣던 딸아이가 나와서는 신기해한다. 시간 내서 바느질 정도는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금치를 무쳤다. 어제 사다 놓은 두부를 부쳤다. 금세 식사 준비가 완료되었다. 문득 '생산'의 기쁨, '창조'의 기쁨을 느꼈다. 인간의 손으로 할 수 있는 게 이렇게나 많다. 내일은 이 손으로 무엇을 창조할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