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구, 시상에, 변소깐 옆에서 어티케 밥을 먹는댜-아?"
늘 동네 새소식을 물고 오는 울 엄마의 말씀이다.
"에이, 엄마! 그런 게 어딨어?"
"아녀. 진짜 있댜. 그게 뭐냐 하면 '아빠또'랴."
내가 중학생 때, 그러니까 1970년대 말 그 어느 쯤에 들은 '아파트'에 대한 얘기다. 엄마도 나도 처음 듣는 이 '신문물'에 대해서 어리둥절했다. 엄마의 자세한 설명에 따르면 먹고 자고 씻고 싸고 하는 모든 일들이 한 자리에서 해결된다는 거였다. 문 하나만 열면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믿기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얘기였다. 흑백텔레비전이라 그런가? 관심 있게 보지 않아서 그런가? 아무리 떠올려봐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사돈집과 뒷간은 멀수록 좋다.'는 조상님네들의 속담대로 살던 시절이었다. 시골 동네 집집마다, 변소는 안채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했다. 우리 집 변소는 대문 열고 바깥 마당 가장자리에 있었다. 어떤 집은 화장실 변기 옆에 두엄(아궁이에서 가져온 재로 거름을 만듦)까지 함께 자리했다. 나의 당숙부네가 그랬다. 먹는 일은 또 어떤가. 부엌에서 아궁이에 불 때서 밥을 짓고 국을 끓여서 밥상에 담아다가, 마루를 지나 방에서 온 가족이 식사를 했다. 물론 여름에는 마루에서 먹었지만. 욕실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마당 가장자리에 펌프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하는 일이 많았다. 채소도 씻고 몸도 씻고 빨래도 하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씻는 일은 다 했다. 그런 일들을 한 자리에서 다 하다니, 아빠또라는 곳은 참 이상했다.
1980년, 대전으로 고등학교를 가면서 아파트를 처음 보았다. 대전시 태평동 삼부아파트. 이게 내가 처음으로 가 본 아파트였다. 한 겨울이었는데, 현관문이 열리면서 얼굴에 다가오는 방 안의 열기가 후끈했다. 친구네 식구들은 파자마를 입었거나 반팔을 입었거나, 아무튼 이불속에서나 입음직한 가벼운 차림이었다. 들어가자마자 식탁이 있었고, 그 맞은편으로 욕실이 있었다. 용변을 보러 들어갔더니 방금 온수를 써서인지 수증기가 가득했고 따뜻했다. 머리를 감고 나온 친구가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렸다. 헤어드라이어는 아버지 따라간 이발소에서나 보았던 물건이었다.(참고로, 나는 어렸을 적에 미용실에 간 게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이발소에서 머리를 잘랐다.)
내가 사는 시골집 하고는 너무나 달랐던 친구네 집이었다. 그때부터였던가. 아파트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결혼하면 아파트에 살고 싶었다. 그러나 가난한 남편과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방 한 칸, 부엌 하나, 부엌과 연결된 변기 하나. 그야말로 한 자리에서 모든 게 해결되는 구조였다. 3층짜리 건물. 인천시 중구 용동. 동인천역 앞 큰길을 지나, 인현 통닭집 골목에서 신신 예식장(지금은 요양병원이 자리함)으로 가는 언덕배기, 여인숙 골목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신혼살림이래야 책상 하나, 비키니 옷장 하나, 대전역에서 사 온 중고 흑백 TV, 서랍장 하나가 다였다. 세탁기 놓을 자리가 없어서 세탁기는 나중에 사기로 했다. 어느 겨울날 수도꼭지가 얼어서 지하실에 가서 물을 받아 오고, 그곳에서 빨래를 했다. 추위를 피해 지하에 잠시 데려다 놓은 강아지가 빨래하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집이 얼마나 허술했는지, 한 번은 층계참에 쌓아 놓은 연탄 백여 장이 쓰러져 산산조각이 났다. 계단이 온통 검은 연탄의 잔해였다. 그 원인은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신신 예식장에서 주차장 공사를 하느라 진행한 굴착기 작업이 문제였다. 작업반장을 찾아가 항의를 하였다. 내 항의를 받아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하였지만 용기를 냈다. 작업반장과 다른 아저씨 한 분이 현장을 확인하고 난 후, 계단의 연탄 잔해를 다 치웠다. 원상복구를 하고 연탄값을 변상받았다. 시골 처녀가 도시 빈민가에서 살면서 겪은 설움이었다. 퇴근한 남편에게 낮에 있었던 연탄 사건에 대하여 호기롭게 자랑하였다. 내가 다 해결한 거라고.
얼마 전에, 딸아이 둘을 데리고 내가 신혼살림을 했던 그곳에 가 보았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고, 공동현관문손잡이는 굵은 철사로 묶여 있었다. 짐작에, 사람이 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때는, 1층에 주인 할머니와 20대 손자가 살았었고, 2층에는 젊은 여자가 초등 1년생 아들과 함께 살았다. 그리고 3층이 우리 방이었다. 이곳을 떠난 그 사람들도 잘 살고 있겠지, 생각했다. 주인집 할머니는 돌아가셨겠지만. 이웃했던 할머니들은 어떻게 살고 계실까. 그 할머니들도 모두 돌아가셨을 것 같다. 여름 아침이면 여인숙 앞 골목에서 할머니들이 일찌감치 앉아 연신 부채를 부쳤다. 남편이 출근을 하면 나는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었다. 어느 할머니가 "참 좋을 때다." 다른 또 할머니는 "으이구, 그렇게 좋나?" 하면서 응원 보내준 적이 있다. 할머니 말대로 참 좋은 시절이었다. 신혼 때는 다 그렇듯이.
결혼 후 3년쯤 지난 그 언저리 어느 때, 아파트가 내 집이 되었다. 남편과 내가 열심히 저축해서. 지금은 맞벌이 부부도 내 집 마련하기가 어렵지만, 그때는 둘이 잘만 모으면 십 년 안에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었다. 18평 아파트. 방 2개에 화장실 하나. 거실은 패스. 좁은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 그곳에서 부모를 모시고 아이를 키우며 사는 부부도 있었다. 여름이면 여러 사람이 주차장에 나와서 돗자리 펴고 부침개를 해 먹기도 했다. 주차할 차가 그리 많지 않아서 공간은 늘 널찍했다. 사람들 인심만큼이나 넉넉했다. 요즘 세상에는 택도 없는 소리겠지만 그때는 그럴 수 있었다. 그렇게 오순도순 살았다.
살아온 시간이 늘면서 내 통장 잔고도 늘었다. 아파트 값은 더 치솟았지만. 은행 대출을 받아 내 집 평수도 늘었다.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어서인가. 지금도 아파트 뉴스 기사만 나오면 눈길이 간다. 그러지 말아야지, 욕심내지 말아야지, 이 다짐을 실천하기 위해 글을 쓰면서 욕심을 누른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누군가에게는 선망의 대상일 테고, 내가 먹고 있는 이것이 누군가에게는 눈물지으며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음식일 수도 있다. 먹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병이 나서 먹지 못할 수도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오늘은 누군가에게는 간절했던 내일이라고 했던가. 내가 가진 모든 것에 감사하자고 내 마음을 다독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