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사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by 강지영

사들이는 책은 넘쳐나고 집 평수는 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책을 정리하기로 했다. 읽을 만한 사람에게 주기도 하고, 중고서점에 팔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였다. 가장 아쉬운 것은 폐휴지 박스에 버릴 때다. 일차로 한 번 훑어보고 거실 한편에 둔다. 며칠간 묵혀 두었다가 진짜 버려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 그러고 나서 버리기도 하고 다시 책장에 꽂기도 한다. 이중으로 꽂아 놓은 책을 정리해 놓고 나니 뒤쪽에 있던 책이 눈에 들어온다. 앗, 이런 책이 있었네, 놀라움과 반가움에 다시 읽어보기도 한다. 쓰기보다는 읽기가 더 재미있다. 누군가는 읽다 읽다 자기 안에 든 것이 차고 넘쳐서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하더라만, 나는 아직 쓸 때가 아닌지 읽는 게 더 좋다. 책장에 꽂힌 전집을 보니, 초등학교 때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사전을 부상으로 받았다. 꽤 두꺼운 한자 자전, 영어 사전을. 나름 모범생이어서 큰 상을 받았다. 내가 초등학교 때 모범생이었던 이유를 여기서 밝혀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작가로서의 양심에 기대서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다른 친구들은 보통 여덟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데, 나는 아홉 살에 입학했다. 1년이나 뇌가 더 발달해서 공부를 시작했으니, 당연히 공부를 잘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큰언니에게 내가 초등학교 입학이 늦었던 이유를 물었다. 아버지가 동네 어른에게 내 출생신고를 부탁했는데, 그 어르신이 신고를 누락했다는 사연이다. 60년대 당시 시골에는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대부분 사람이 '좀 배운 사람'에게 자녀의 출생신고를 맡겼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도 동네에서 좀 배운 사람에게 출생 신고를 의뢰했는데, 그 사람이 그걸 실수로 빠뜨리고 1년이나 지나서 출생 신고를 했단다. 그래서 내 주민등록번호 앞자리는 제대로 된 출생연월일이 아니다. 섭섭한 일이지만 어쩌랴.


다시 사전 얘기로 돌아온다. 사전을 두 권이나 상으로 받았던 때이다. 지금이나 그때나 사전 값이 다른 책에 비해 비싼 편이다. 나는 상으로 받은 사전 값을 알아보았다. 사전 값을 더해 보니 꽤 큰 금액이다. 처음으로 책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신통스러운 꾀가 떠올랐다. 돈이 없다. 돈은 아니지만 돈값어치를 하는 물건은 있다. 사고 싶은 물건이 따로 있다. 그러면 바꾸면 되는 거 아닌가? 바로, 물물교환! 엄마에게 내 묘안을 말하니,

"글쎄, 그게 그렇게 니 맘대로 되겄냐?"

"아니, 엄마, 그게 왜 안돼? 이 사전이 모두 새 건데, 그리고 아직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건데?"

딸의 야심 찬 계획을 무너뜨리지 못한 걸까. 아니면 엄마가 좀 배운 사람이 아니어서였을까. 엄마는 내가 하는 대로 그냥 놔뒀다. 어린 시절, 내가 하는 일에 엄마는 크게 부정하거나 말리지는 않았다. 나를 믿어서였을까. 오 남매에 모두 관심 둘 여력이 부족해서였을까. 엄마는 내게 매우 허용적이었다.


돈 대신에 상으로 받은 사전을 주고 다른 책을 사 오자, 이 게 내 계획이었다. 사전 두 권을 들고 서점으로 향했다. 등하굣길에 눈여겨보았던 '금남 서림'. 우리 동네에 서점은 거기뿐이었다. 밖에서 보니 안에 누군가 있다.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저기, 제가 책을 사고 싶은데요."

"네, 골라 보세요."

"근데, 돈으로 사는 게 아니에요."

"네? 그게 무슨 말인지..."

"제가 사전이 두 권 있어요. 이거예요. 새 거예요. 사전 두 권 값에 해당하는 책으로 바꿔주실 수 있죠?"

요즘 같았으면 당연히 영수증을 확인했을 터이지만, 사전을 받아 든 그 사람은 그러라고 했다. 허락을 받고 나는 전집을 골랐다. 내가 읽고 싶었던 책을 전집으로 배달해 줬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냐고, 묻는다면 나도 할 말은 없다. 그냥 그게 가능했다. 실제상황이다. 어리숙한 시절이었다. 빈 책꽂이에 책을 꽂아 놓으니, 공부하는 사람 집 같았다. 내가 대단한 학자라도 된 듯했다. 공부가 저절로 될 것 같았다. 서랍 속까지 꼼꼼히 책상 정리를 했다. 마루와 마당 청소까지, 힘닿는 대로 마쳤다.


그날 저녁때, 서점 주인아저씨가 우리 집에 왔다. 나에게 책을 팔았던 사람과 함께. 결국 잘못된 판매라고 하여 사전은 돌려받고, 서점에서 가져온 책은 모두 돌려주어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이없는 일이었다. 사전 두 권을 받고 나에게 전집을 내 준 그 사람은 크게 꾸지람을 받았을 것이다. 아마 부모님을 돕기 위해 잠시 서점에 나왔다가 나 같은 '특이한' 손님을 만난 아들이었을 것으로, 지금 짐작한다. 그때 내가 고른 책이 뭐였지, 도대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참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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