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인터넷)
"캔서입니다."
조직검사 결과를 보고 의사가 한 말이다. 일주일 전에 오빠의 권유로, 나는 위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세상에서 처음으로 '캔서'라는 말을 들었다. 생소한 낱말이었다. 동행한 사람에게 물었다.
"오빠, 캔서가 뭐야?"
"..."
의사는 별거 아니라고 수술하면 괜찮다고, 바로 입원수속을 밟으라고 하였다. 오빠는 진료실을 나와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위암인데, 초기라서 수술하면 괜찮다고 하였다. 그런데, 오빠의 표정이 뭔가 어두웠다. 그래도, 의사도 오빠도 괜찮다고 하니까 그리 무섭지는 않았다. 지금처럼 의학 정보가 넘쳐나던 시대도 아니었기에 나는 캔서가 암이라는 것도 몰랐고 그렇게 심각한 병인지도 몰랐다. 모르는 게 약이라던가. 여기서 '오빠'는 생물학적인 형제자매의 오빠가 아니라, 내가 사귀던 남자다. 나와 여섯 살 차이가 나서, 오빠라고 불렀다.
오빠와 사귄 지 5년 차, 내 교사생활 2년 차, 정확하게는 1988년 11월 말이었다. 오빠는 나와 함께 동행하여 내 부모님께 진료 사실을 알렸다. 대학 2학년때부터 오빠랑 연애를 했는데, 내 부모님이 그와의 만남을 극구 말리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게 우리 집 첫 방문이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방문에 부모님은 크게 놀라셨고, 그가 쏟아놓는 말에 더욱 놀라셨다. 그는 괜찮다고, 수술하면 나을 수 있다고 부모님을 안심시켜 드렸다. 나는 그때 무얼 했는지 생각이 잘 안 난다. 그에게 맡긴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기억나는 게 없으니까. 부모님이 얼마나 놀라셨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서른도 안된 딸이 암이라니, 얼마나 가슴이 미어졌을까를 생각하면, 그 후 부모님이 나 때문에 얼마나 가슴 조이며 사셨을지, 이건 죄송하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된다. 죄송하다는 말 말고 다른 표현을 찾지 못하겠다. 불효도 이만한 불효가 어디 있을까.
태어나 처음으로 입원이라는 걸 했다. 얼마나 철이 없었는지, 캔서가 뭔지도 모르고 의사와 오빠가 괜찮다고 하니까 괜찮은 건 줄 알았다. 6인실 병실에 도착하여 환자복으로 갈아입었다. 오빠는 내 긴장을 풀어 주려고 장난을 쳤다. 나는 누워 있고 오빠는 보호자용 의자에 앉아서 농담을 하며 키득거렸다. 기본적인 에티켓도 못 지켰다. 보다 못한 앞 침대에 계시던 중년 부인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큰 소리로 꾸짖었다. 오빠가 미안함을 표시하고 농담을 그쳤다. 입원한 첫날부터 오빠는 엄마와 함께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 엄마는 연세도 많으셨고, 긴 시간을 간호하기가 힘에 부칠 때가 많아서 힘든 간호는 오빠가 많이 했다. 의사도 오빠에게 '박군'이라고 하면서 보호자 대우를 했다. 오빠가 생물학 전공자라서 위암 치료에 대한 의사의 설명이나 조언을 잘 알아들었다.
그 병실에는 위암 수술환자, 유방암 수술환자, 대장암 수술환자, 모두 암 수술 환자였다. 나중에 유방암 수술 환자 남편되시는 분이 우리에게 알려준 정보에 의하면, 시끄럽다고 꾸짖은 그 중년 부인은 남편이 외도를 하여, 자기 마누라가 병원에 입원했는데도 수술하는 당일에만 병원에 오고 그때까지 한 번도 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니 젊은 남녀가 시시덕거리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났을 것 같다고, 오빠와 나는 이해했다. 그리고 그 부인이 가엾다고 생각했다.
1988년 12월 1일, 새벽부터 간호사들이 병실을 드나들었다. 채혈을 하고, 혈압을 재고, 항생제 반응 검사를 하고, 여러 가지 검사를 또 했다. 음모를 깎고, 소변줄을 꼽았다. 콧줄도 꼽았다. 부모님과 언니들이 왔다. 오빠는 그 간의 진행 상황을 알렸다. 마침내 수술실. 영화나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수술실에 내가 들어갔다. 마취가 되고 깨어나 보니, 회복실이었다. 얼마나 추웠는지 이가 드드드 떨렸다. 회복실에서 병실로 오는 내내 오빠와 엄마가 내 손을 잡았다. 언니가 이불을 고쳐 덮어 주었다. 아버지는 이 기막힌 상황을 삭히시느라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 중이었다. 아버지도 내 손을 잡으시면서 아무 말씀 하지 못하셨다.
병실로 돌아왔다. 전 날에 나를 꾸짖던 중년 부인도 다른 환자분도, '장하다'라고 '큰일 해냈다'라고 응원해 주었다. 고마운 분들이었다. 수술한 첫날은 평온하게 지나갔다. 다음 날부터, 투병이 시작되었다.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던 간호사나 의사들이 '기침'을 하라고 했다. 그것이 쉽지가 않았다. 수술하면서 생긴 이물질을 억지 기침을 해서 가래를 뱉어내야 한다는 걸로 기억한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수술한 부위가 땅기고 아픈데, 기침을 하라니. 오빠는 침대에서 나를 일으켜 앉히고 기침을 시켰다.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바라보는 오빠 심정은 어땠을까. 오빠는 내 상체가 울려서 아플까 봐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기침을 시켰다.
기침을 해서 가래를 뱉어내고, 가스가 나오고, 이제는 식사를 하게 되었다. 위장의 반 이상을 절제했기 때문에 내 위장은 반도 안 남게 작아졌다고 했다. 한꺼번에 많이 먹지 말고 하루에 5번~6번으로 나누어 먹으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힘든 과정이 또 다가왔다. 운동이었다. 장 운동을 시켜야 배변이 쉽다는 것이었다. 오빠는 나를 침대에 누워 있지 못하게 했다. 병원 복도를 데리고 다녔다. 링거를 꽂은 상태로 걷기 운동을 했다. 수술 후 변비가 있었는데, 병원 복도를 왔다 갔다 했더니 배변이 되었다. 그것도 아주 색깔이 진한. 간호사는 혹시 '짜장색깔'아니냐고 했다. 그렇다고 했다.
아침이면 의사 회진이 있었다. 거의 매일 있었다. 간호사가 회진 시간이 다가옴을 알리면, 병실 침대를 정돈하고 보호자는 모두 복도로 나가게 하였다. 의사는 여러 레지던트나 인턴 간호사들을 동반하고 병실로 들어온다. 하얀 가운 자락을 휘날리며 왔다. 2007년 mbc드라마 <하얀 거탑>에 나오는 외과의사 장준혁(김명민 분)이 연상되는 분위기였다. 나는 의사가 들어오는 회진 시간이 참 좋았다. 나를 수술한 의사는 내 수술 상처를 보고, 잘 되었다고 잘 회복되고 있다고 하면서 손을 잡아 주었다. 나는 의사를 무한 신뢰하였다. 의사가 수술 상처를 만져 주기만 해도 금방금방 좋아지는 것 같았다.
퇴원하고 얼마 안 지나서 항암주사를 맞으러 갔다. 수술보다 힘든 게 항암주사였다. 그 주사를 맞고 나자 물 한 모금도 넘길 수가 없었다. 심한 구토 증세가 나타났다. 힘이 빠졌다. 내 몸을 어찌 움직일 기력이 없었다. 배도 아팠다. 약을 먹어도 소용없었다. 다시 입원을 하였다. 수액을 맞으면서 진통제를 맞았다. 진통제를 맞을 때뿐이고,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또 아팠다. 개복 수술 후유증으로, 흔한 증상이라고 하였다. 장유착. 시간이 지나도 장유착이 개선되지 않으면 개복수술을 하여 장을 원상태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했다. 또 수술이라니, 무서웠다. 오빠와 나는 링거를 꽂은 채로 병원 복도를 걸었다. 장운동이 되게 하기 위해서. 다행히 수술은 하지 않고 퇴원할 수 있었다.
어느 날 항암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갔는데, 의사는 내 배를 진찰하며 이렇게 말했다.
"강 선생, 학교는 어떻게 하고 있나?"
"네, 다니고는 있어요."
"강 선생, 대단해. 항암주사 맞으면서 직장 다니기 힘들 텐데. 월급 받아서 병원비로 다 쓰겠네... 잘 회복되고 있어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나는 의사의 모든 말이 고마웠고, 따스했고, 큰 위로가 되었다. 참 좋은 의사였다. 가톨릭대학교 대전성모병원 일반외과 강래성 박사. 지금은 고인이 되신 고마운 의사다.
병실에서 오빠는 옛추억을 되살려 주었다. 그 추억 속으로 들어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