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의 시기

-1983년의 기록-

by 강지영

(사진출처:인터넷 -영화 <마틴 에덴>에서)


1983년 3월, 나는 공주교육대학에 입학하였다. 알려져 있다시피 교대는 초등교사 양성대학이다. 졸업하면 거의 대부분이 초등교사로 임용된다. 4년 동안, 너무나 많이 들은 말이 '교육'이었다. 교과목에도 모두 교육이라는 글자가 붙었다. 교육원리, 유아교육, 교육심리, 교육사, 교육철학, 컴퓨터교육, 교육과정평가, 교육사회학, 교사론, 영어교육, 등. 그리고 학년이 올라가면서 초등학교 교과 지도법을 배운다. 나는 '지적 목마름'이 타고 있었던지라 교육대학의 공부 내용이 성에 차지 않았다. 뭔가 깊이가 없다고 느꼈다. 각 분야의 공부를 겉핥기식으로 하는 듯했다. 독학으로 하면 되지 않겠나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혼자 찾아서 공부하기에는 기초 역량이 부족하였다.


지적 욕구에 시달리던 중, 다른 대학교에 다니는 친구를 만났다. 충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다니는 정oo. 그 친구와 얘기를 하다가, 교대 신언철 교수님이 충남대에서도 강의를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친구와 함께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러 갔다. 조그만 강의실이 아니라 소강당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신언철 교수님의 강의 내용은 교대에서 강의하시는 것과 너무나 달랐다. 일반대학교 인문학 강의였으니까 교대 강의하고는 강의 목표나 내용이 달랐을 게 당연하였다. 충남대에서 들은 문학 강의에 매료되었다. 나는 진정한 교대 학생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방황이 시작되었다. 일반대학 문학 강의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어떻게 들어온 대학인데, 그만둘 수도 없었다. 다른 공부를 할 수도 없었다. 좋은 성적을 받아야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교대 학과 공부에 매진했다. 그러면서도 내 마음속 한편에는 늘 문학에 대한 갈망으로 괴로웠다.


그 후로부터 나는 친구와 함께 다른 대학교에 가서 몇 번 도강하였다. 어떤 날에는 다른 학교 축제에 가서 특강을 듣기도 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대전의 한남대학교였다. 한남대학교 강당에서 함석헌 님의 특강을 들은 일이 생생하다. 백발이 성성하셨고 수염도 하얬다. 피부가 뽀얬다. 하얀 바지저고리에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오셨다. 구두까지도 하얀색. 힘찬 걸음으로 들어와서 강단에 서셨다. 청중은 박수로 환영했다. 역사와 현실 인식에 대한 강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두환 씨가 대통령으로 있을 때였으니, 역사학자로서 얼마나 울분이 많았겠나. 강의 내내 이어지는 함석헌 님의 목소리는 강당을 쩌렁쩌렁 울렸다. 노구임에도 목소리는 우렁찼다. 독립투사 같은 이미지였다. 강의가 끝나고 함석헌 님은 가곡 '선구자'를 선창 하셨다. 모두 일어서서 가곡을 불렀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 한 줄기 해란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뭔가 큰일을 해낸 것 같이 감격스러웠다. 내 인생에서 만난 잊지 못할 큰 어른이다.(최근에는 가곡 '선구자'에 친일 논란이 일기도 했음)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은 아르바이트의 연속이었다. 요즘 교대 학생들은 과외 선생을 많이 한다던데, 그 당시에는 과외가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대학생의 아르바이트는 매우 다양했다. 나도 그랬다. 대학생이 되고 첫여름방학이었다. 당구장 카운터에서 일했다. 한 달도 되지 않아 그만두었다. 어떤 제대군인이 당구장에 자주 오더니, 어느 날에는 퇴근길까지 쫓아오며 사귀자고 하였다. 그래서 당구장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 그다음에 간 곳이 통조림 공장이다. 트럭에 실렸던 복숭아가 생산 라인으로 들어오면 여자들이 기구를 이용하여 복숭아를 반으로 자른다. 자른 복숭아를 뜨거운 물에 데친다. 복숭아 껍질이 자동적으로 벗겨진다. 알몸이 된 복숭아를 찬물에 담가 식히고 건져낸다. 그리고 접시저울에 달아 캔에 담는데, 이 일을 내가 했다. 하루 종일 서서. 뚜껑이 덮이고 포장 박스에 담긴다. 이것이 내가 본 통조림 제조 과정의 요약이다. 지금은 이 모든 과정이 기계화되었을 터이지만 그때는 대부분의 생산라인에서 사람들이 서서 이 작업들을 해냈다. 생산라인에서 노동하는 인간이 기계의 부속품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지루하고 힘들었지만 버텨냈다.


겨울 방학에 간 곳이 사탕 공장이었다. 충남 연기군 금남면 종촌리(지금의 세종시) 사탕공장이었다. '꽃마음 사탕', '밀크캐러멜'을 만드는 소규모 공장이었다. 사탕 제조 공정을 보니, 거대한 물엿 덩어리에 색소와 향을 넣는다. 반죽을 한다. 기계 속에 반죽을 넣으면 동글동글한 사탕이 되어서 튀어나온다. 나는 사탕을 저울에 달아서 봉지에 넣는 일을 했다. 내가 저울과 무슨 인연이 있어서인지 또 저울질을 했다. 말을 해서도 안된다. 아마도 라디오는 주야장천 들었던 것 같다. 겨울이었음에도 난방은 충분하지 않았다. 사탕이 녹으면 안 되니까. 일하던 도중 어느 휴식 시간, 공장 담벼락에 몸을 기대서서 쉬고 있었다. 같이 일하던 여자는 내가 대학생이라는 것을 알고 무척 부러워하였다. 힘들고 지루한 노동이었지만, 방학만 끝나면 이 공장 일도 끝나고, 학교만 졸업하면 공장 같은 데는 안 와도 된다고 생각하니, 나는 견딜만했다. 또 지루하고 힘들었지만 버텨냈다. 그때 같이 일하던 내 또래의 여자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곳에서 잘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다.


다음 해 3월, 학교에 가기 위해 공주행 시외버스를 탔는데, '멋진 오빠'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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