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오빠

(1984년 3월의 기록)

by 강지영

(사진출처:인터넷 -알베르 카뮈)


대학 2학년 3월의 어느 날, 학교에 가기 위해 공주행 시외버스 정류소에 갔다. '멋진 오빠'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 1년 간 공주로 통학을 했는데도 못 본 사람이다. 1년간 내가 무엇을 보고 걸어 다녔는지 무슨 상념에 빠져 그를 못 본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그날 그를 처음 보았다. 그를 본 순간,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저 한낱 배경에 불과했다. 주변 인물일 뿐이었다. 그만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주인공이었다. 덥수룩한 머리, 낡은 스웨터와 점퍼, 무릎이 나온 코듀로이 바지, 그리고 초췌한 얼굴. 그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이 철학자 같았다. 그마저도 예사롭지 않았다. 모든 것이 특별해 보였다. 내 인생에서 중대한 시점에 돌입했다.


정류소에 버스가 오자, 그는 피우던 담배꽁초를 모래통에 넣었다. 내가 앞에 서고 그는 담배 처리를 하느라고 몇 사람 뒤에 섰다. 버스에 올라가니 빈자리가 눈에 띈다. 나는 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이 하나 둘 탑승하고 그가 내 자리 옆에 섰다. 그가 가방을 들고 있었다. 동네 왕진 의사들이 사용할 듯한 검은색 큰 가방이었다.

"저기, 가방 들어 드릴까요?"

"아, 제 가방이 좀 무거운데... 고맙습니다."

내 무릎에 올려진 그의 가방이 묵직했다. 그는 점퍼 주머니에서 무언가 종이를 꺼내더니 읽기 시작했다. 30분쯤 지나, 공주사범대학 정류장에서 내렸다. 사대학생인가 보다, 라고 짐작했으나 확신은 없었다. 예전에는, 버스에 앉은 사람이 서 있는 사람의 무거운 가방, 특히 책가방을 받아서 자기의 무릎에 올려놓아주는 미덕이 예사였다. 그의 가방을 받아 든 것은 특별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지만 나에게는 특별했다.


그날부터 그가 내 머릿속으로 내 가슴속으로 들어와 버리고 말았다. 거리에서 걸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강의실에서도, 문득문득 그의 모습이 떠올라 눈을 질끈 감고 애써 외면하려고 했다. 그렇게 해도 떠오르는 것을 잠재우기는 어려웠다. 다음부터는 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내내 그를 찾았다. 찾으려고 의도하지 않아도 내 몸이 자연스레 움직였다. 그가 금세 눈에 띄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내가 그와 거리를 두는 거였다. 이제는 버스에서도 그 사람 근처에 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의 가까이에 있으면 내 몸이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내 시선을 그가 눈치챌까 봐 긴장되었다. 두 팔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거추장스럽게도 느꼈다. 더 이상한 일은, 그런 불편함 속에서도 그의 정체가 궁금했다.


며칠을 그렇게 지내고 있는데, 공주사대 사회교육과에 다니는 내 친구 oo이가 뜻밖의 제안을 하는 거였다.

"지영아, 다음 주에 공주에서 금호중학교 동문회가 있는데, 올래?"

"그게 뭐야?"

"금호중학교 졸업하고 공주에서 대학 다니는 사람들이 동문회 하는 거야. 선배들도 만나고, 좋아."

"그래? 그럼 가지 뭐. 언젠데?"

혹시나 하는 설렘으로 며칠을 보냈다. 일주일이 참 길기도 했다.


약속된 장소에 가니, 꽤 많은 사람이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옆자리에 내 친구 oo이 앉아 있었다. 그와 내 친구 oo은 무척 친밀해 보였다. 서로 마주 보고 이야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가 내 친구 oo이의 무릎에 손을 얹기도 하였다. oo이가 그의 어깨를 툭 치기도 하였다. 깊은 연인관계로 보였다. 그간 내가 애태우고 긴장했던 시간들이 창피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혼란스러운 심정이었다. 그렇게 가깝게 사귀는 친구의 남자를 뺏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크게 낙심하여 마음을 추스르느라고 정신줄을 놓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 자기소개 차례가 되었다. 그는 공주사대 생물교육과 3학년 학생이었다. 군대 다녀온 복학생이라서, 나랑 여섯 살 차이가 났다.


그렇더라도 확인은 하고 싶었다.

"oo아, 그 박종환 선배 말이야. 혹시 너랑 사귀니?"

"엥? 아니. 왜?"

"너랑 가까워 보여서..."

"사귀기는... 종환이 오빠는 우리 이모할머니 손자야."

"어, 진짜? 그럼 니네 할머니랑 선배네 할머니랑 자매지간인 거야?"

"그래, 그렇다니까. 왜, 오빠한테 관심 있어?"

"아니, 뭐... 궁금해서."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내 안에서 무언가 폭발할 것 같았다.


어떻게 대시를 할까, 내 머리를 총동원하여 궁리하였다. 좀 더 멋있게, 좀 더 세련되게, 그게 뭘까. 며칠 후, 버스 정류소에서 그를 만났다.

"저, 선배님, 뭐 좀 부탁해도 될까요? 우리 생물과 교수님이 과제를 내주었는데요.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한 거예요. 혹시 자료 좀 주실 수 있나요?"

이렇게 말해놓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그가 거절할 거라고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내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다. 스스로 신의 한 수 같은 대시라고 생각했다.

"그럼. 오늘 오후에 학교로 와. 생물과로 찾아오면 돼."

"네, 고맙습니다."


그날 오후, 약속된 장소를 물어물어 찾아갔다. 긴장이 되어서 안내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간신히 자연과학대학 건물로 들어갔다. 생물과 실험실에서 몇몇 사람들이 실험도구를 씻고 있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낯선 학생이 물었다.

"네, 박종환 선배님을 만나러 왔는데요."

"형, 형 만나러 오셨다는데? 호옥시 사귀는 중? 흐흐흐"

"응, 사귄다. 왜!"

"진짜? 여자분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어봐야 해. 형이랑 사귀세요?"

"아, 네..."

그 자리에서 사귄다고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설령 사귀는 정도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형'의 입장을 생각하면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부정한다면 선배의 입장이 얼마나 난감하겠는가. 그렇게 하여 나는 선배와 사귀는 게 기정사실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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