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화차

낭만의 시기-에피소드(1)

by 강지영

(사진출처 : 인터넷 -한방차 설다원 블로그에서-)


낭만이라! 바로 떠오르는 게, 가수 최백호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가 있겠다.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 보렴.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 사이로,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 보렴.~~'


또 있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본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아직 드라마를 시청하지 않은 분을 위해 간략히 소개해 보자.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은 구한말 일제강점기다. 누구는 나라를 빼앗겨 독립운동을 하느라 목숨을 걸었고, 누구는 신문물에 눈떠 '모던'을 향유하는 혼란스러운 시대다. 조선의 마지막 자존심이랄까, 고애신(김태리 분)은 한양 명문가의 귀한 여식이나 위기에 빠진 조선을 구하기 위해 일제에 총구를 겨눈다. 유진초이(이병헌 분)는 종놈의 자식으로 태어나 미국으로 밀항하여 해군 장교가 되고, 조선 미국공사관에 파견된다.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복면을 한 저격수로 만난다. 두 사람의 표적은 같다. 여기서 중요한 게, 복면을 한 상태이니 당연히 눈빛만으로 서로 탐색한다. 뭔가가 통하는 시점이다. 그 후 서로 연모의 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어느 날, 유진초이를 만난 고애신은 이렇게 자기의 연정을 고백한다.


"신문에서 작금을 낭만의 시대라고 하더이다. 그럴지도. 개화한 이들이 즐긴다는 가배, 불란서 양장, 각국의 박래품들. 나 역시 다르지 않소. 단지 나의 낭만은 독일제 총구 안에 있을 뿐이오. 혹시 아오? 내가 그날 밤 귀하에게 들킨 게 내 낭만이었을지."


참고로, '가배'는 coffee의 음역어(音譯語)이다. 일본은 coffee를 '珈啡'라고 표기했다. 우리는 그걸 가배라고 읽었다. 내가 왜 이렇게 장황하게 대중가요와 드라마 얘기를 하는지, 아직은 모르실 것 같다. 서두르지 마시길...


1984년 3월, 공주사대 생물학 실험실에서 그와 내가 연인으로 기정사실화된 이후, 급속도로 친밀해지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첫차를 타고 공주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내렸다. 첫차니까, 오전 8시 전후에 공주 터미널에 도착했을 것이다. 여기서 잠시 그와 나의 통학로를 보면, 대평리-공주사대-공주시외버스터미널-공주교대이다. 그날은 두 사람 다 이른 수강은 없었다. 하여 터미널에서 교대까지 걸어가기로 하였다. 가는 도중에 어느 다방에 들어갔다. 문을 열자, 감미로운 색소폰 소리가 으늑히 흘러나왔다. 홀 가운데에는 커다란 수족관이 자리했다. 수족관의 관상어나 홀 안의 사람들이나 같은 리듬으로 움직였다. 느릿느릿. 아침잠이 없어서 이른 아침에 다방 마실을 온 것인지, 노인 남자만 몇몇 보였다. 여자는 마담과 나뿐. 낯선 풍경에 도로 나가려고 하자, 한복을 곱게 입고 올림머리를 한 '마담'이 물 잔을 들고 와서 무얼 주문하겠냐고 했다. 우리 둘이 머뭇거리고 있으니까, 그럼 쌍화차를 마셔보라고 했다. 얼떨결에 그러겠다고 했다.


마담이 가져온 쌍화차는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커다란 찻잔에 담긴 쌍화차는 잣과 채 썬 대추를 동동 띄웠다. 옆자리에는 계란 노른자가 담긴 종지도 있다. 또 그 옆에 한과, 그리고 떡까지 차려졌다. 이게 다 뭔가. 마담은 차가 식기 전에 계란 노른자를 찻잔에 얼른 넣으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했다. 커피값 정도로 든든한 식사를 한 느낌이었다. 잠시 후, 마담이 우리 가까이에 오더니,

"두 사람, 너무 잘 어울린다!"

하며 더 필요한 거 없냐고 했다. 더 필요한 건 당연히 없었다. 연인에게 그보다 더 좋은 덕담이 어디 있으랴. 가끔, 아주 가끔, 아침에 그 다방에 가면 쌍화차를 시켰다. 이제는 아예 쌍화차에 계란노른자가 동동 띄워진 채로 써빙되었다. 그 다방에 몇 번 갔다. 안 가게 된 이유가 있다. 어느 날, 다방에 갔더니 우리 학교 음악과 교수님 한 분이 모닝커피를 마시러 혼자 오신 거였다. 나는 그 교수님께 인사를 하였다. 그 교수님은 차를 다 마시고 이제 학교로 가려고 하는데, 학교까지 자기 차로 같이 가자고 했다. 오빠가 사양하라고 해서 사양하고, 그다음부터 그 다방에는 가지 않았다. 이렇게 우리의 낭만은 가배가 아니라, 쌍화차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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