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의 기록)
(사진출처 : 인터넷)
한겨울에 어머니에게서 딸기향이 나곤 했다. 땀 속에 스며든 향내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어머니는 품삯과 함께 소쿠리 가득 딸기를 얻어 왔다. 상품가치가 없는, 조금은 상처 나고, 조금은 고르지 못한 딸기가 훨씬 많았다. 철부지 우리들은 딸기를 배불리 먹었다. 아버지는 입에도 대지 않았는데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야, 나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지금은 제사상에나 올리는 슬픈 딸기가 되었다.
학창 시절, 우리 집은 작은 시골 주택이라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웠다. 내가 언니 동생과 함께 쓰던 방은 부엌-안방-윗방으로 이어지는 윗방이었는데, 밤 10시만 지나면 냉골이 되었다. 초저녁에 아버지가 부엌에서 아무리 아궁이에 불을 때도, 밤새도록 윗방이 온기를 유지하기가 어려운 구조였다. 목도리로 발을 동동 싸매고 담요를 등에 걸치고 면장갑을 끼고 공부했다. 면장갑의 손가락 끝 부분을 잘라냈다. 그래야 책장을 넘길 수 있으니까. 겨울엔 방이 너무 추워서 졸리지도 않았다. 게다가 천장에서는 가끔 쥐가 지나가는 소리까지 들렸다.
더위와 추위를 견디기 위해 학교 도서관에서 주로 공부를 하였다. 그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나는 통학생이었다. 공주교대는 자취생과 기숙사생이 많아서, 시험기간이면 도서관 자리 차지하기가 어려웠다.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공주사대 생물학 실험실에서 그와 함께 공부를 하였다. 우리 집 남의 집 농사일에 바쁜 부모님을 생각하면 학업에 열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두 가지를 다 잘하기는 어려운 법, 연애를 하면서부터 성적이 오르락내리락하였다. 성적우수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대출이자가 없는 대여장학금을 받으면서 학업을 이어갔다.
언니만 둘 있고 오빠가 없는 나에게 그는 든든한 '오빠'가 되어 주었다. 방황과 고뇌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는 상담자도 되어 주었고, 공부를 독려하는 선생님이 되기도 하였다. 친구가 별로 없는 나에게 친구가 되어 주기도 했다. 언제나 내 입장을 고려하여 모든 일을 처리해 주었고 조언해 주었다. 완전한 내 편이었다.
부모님의 노동과 오빠의 도움으로 열. 심. 히. 공부한 결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1987년 3월에 첫 발령을 받았다. 대전시 신탄진초등학교. 이제는 부모님 고생 끝이고 은혜 갚을 시간이라 생각했는데, 다음 해 위암 진단을 받고 수술하고 항암치료까지 받는 불효를 저질렀다.
내가 위 내시경 검사를 받게 된 것도 그의 권유 덕분이었다. 위 수술 전후로 그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면서 잘 회복되고 있었다. 항암치료가 끝나고 1989년 9월, 그는 인천 용현여자중학교로 첫 발령을 받았다. 그의 발령 소식을 듣고,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충남 연기군 금남면(지금은 세종시)과 인천시. 너무나 먼 거리였다. 앞날이 캄캄했다. 그간 내가 그에게 얼마나 많이 의지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가 인천으로 발령을 받고 그와 나는 편지로써 그리움을 달랬다. 넷플릭스에서 본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유진초이(이병헌 분)가 말한 대로, 러브는 총 쏘는 거보다 더 어렵고, 더 위험하고, 더 뜨거운 것이었다.
그렇게 편지로 사랑이 이어지던 중에, 그는 나에게 결혼을 청하였다. 나는 건강에 자신이 없어서 결혼을 미루자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미룰 이유가 없다고 했다. 오히려 결혼해서 곁에 있어야 내 몸을 챙겨줄 수 있다고 하였다. 나도 그와 함께 살기를 원하고는 있었다. 다만 건강을 장담할 수 없어서 선뜻 그러겠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저희, 결혼하겠습니다."
그는 결혼을 선언하였다. 부모님은 몸이 성치 않은데 어찌 결혼을 하겠느냐며 반대하셨지만, 그는 자기가 돌보며 살겠다고 설득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1990년 1월 어느 날 그와 나의 결혼식이 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