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9월의 기록)
(사진출처 : 인터넷)
누군가는, 도화지에 그리면 '그림'이 되고 마음에 그리면 '그리움'이 된다고 했던가. 수백 수천 장의 그리움을 그린 끝에, 이젠 그와의 진짜 신혼생활이 시작되었다. 인천시 동인천역 앞에서 동인천길병원을 지나 3층의 그 작은 단칸방에서. 남편은 나에게 체력단련시켜야 된다고, 억지로 나를 데리고 자유공원을 오르락내리락했다. 오래가지 않았지만. 퇴근 후에는 인천 신포시장에 가서 장보기도 했다. 동인천역 앞 대한서림에서 책쇼핑을 했다. 집 근처 애관극장에 가서 영화도 보았다. 그간에 하고 싶은 일을 하루하루 해 보았다. 우리는 너무 자유로웠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가져보는 낭만이었다. 그러나 이 즐거움이 오래가지 못했다. 각자의 학교 일로 바쁘게 지내야만 했다. 남편은 본격적인 학사일정에 따라 학교업무가 시작되었다. 1990년 9월 중순, 나는 운동회 무용지도로 심신이 고단했다. 무엇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업무들이었다.
내가 인천에 와서 가장 먼저 발령받은 학교가 인천건지초등학교였다. 개교하는 학교라서 어수선했다. 여러 학교에서 전입해 온 교사들이었다. 경인교대 출신이 대부분이어서 몇몇 사람들은 서로 선후배 또는 동기로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도 많았다. 나만이 나만이 진짜 신입교사였다. 지금은 학생 수가 줄었다고 하는데, 그 당시 한 학년이 10 학급, 11 학급 정도였으니 직원수만 해도 엄청났다. 나는 2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다. 인천에 전입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아 모든 것이 낯설었는데, 뜻하지 않은 어려움이 닥쳐왔다. 무용 지도를 해야 했다.
개교하자마자 운동회를 한다는데, 나에게 맡겨진 것이 '꼭두각시' 무용지도였다. 내가 10개 반 아이들의 꼭두각시 무용을 지도해야 하는 거였다. 지금이야 유튜브나 인터넷에서 많은 자료를 구할 수 있겠지만, 그 당시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인천에는 남편 말고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어떡하나. 눈앞이 캄캄했다. 신탄진초교에서 같이 근무하던 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선생님, 어떡해요. 제가 꼭두각시 무용을 지도해야 하는데, 큰일이네요."
"그래? 걱정 마. 내가 도와줄게. 강 선생이 대전으로 와. 내가 자료 줄게."
천군만마를 얻는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1990년 9월 어느 토요일, 남편이 퇴근하는 길로 기차를 타고 대전역에 가서 선배네 아파트로 택시를 타고 갔다. 저녁까지 선배네 거실에서 꼭두각시 무용을 전수받았다. 선배는 미리 무용 동작을 간단한 그림으로 그리고, 동작 설명까지 메모한 자료를 나에게 주었다. (고맙습니다. 선배님!) 나에게 한밤중 꼭두각시 무용을 가르쳐 주셨던 선배님, 1990년 9월, 신탄진초등학교 김경자 선생님, 이제는 선생님의 모습이 자꾸만 흐릿해져 간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배울 때는 알겠는데, 집에 와서 해 보려니 잘 되지 않았다. 알다시피 꼭두각시 무용은 남녀가 짝이 되어하는 무용이다. 하는 수 없이 남편이 남학생 역할을, 내가 여학생 역할을 하기로 했다. 무용 연습을 하면서 남편보다 내가 더 몸치인 것이 들통나고 말았다. 사실 내가 타고난 몸치다. 하는 수 없이 어려운 동작은 빼고, 좀 더 쉽게 쉽게 만들었다. 편집의 기술을 발휘해서. 편집도 창작이지 않은가. 남편과 무용연습을 한 초등학교 교사는 처음일 거라며, 남편 잘 둔 복이라며, 그는 공치사를 했다. 다음 날부터 학교 운동장에서 하루에 서너 동작씩 무용 지도를 했다. 2학년 학생 250명가량 앞에서. 처음엔 떨렸다. 그러나 처음이 어렵지, 하다 보니 자신이 붙었다. 성황리에 운동회가 끝났다. 학년부장과 교감은 수고했다는 한마디뿐이었다. 남편은 운동회를 치르는 나를 보고 초등학교 교사의 고충을 새삼 알게 되었다고 했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옛말, 괜한 말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