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야위었어

(1990년, 주말부부로 7개월)

by 강지영

(사진출처 : 인터넷)

내가 크게 아팠었던 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다. 가끔 위경련이 와서 혼자 병원에 다녀오고, 가끔 소화불량이 와서 병원에 혼자 다녀오고, 그중에도 걸핏하면 찾아오는 '기능성 장 마비'가 가장 힘들었다. 소장 대장 운동이 잘 안 되어 장 경련이 일어나면 배가 뒤틀리게 아팠다. 개복 수술 환자에게서 흔한 증세라고 하였다. 주사 맞고 약 먹으면 잘 치료가 되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프다가 말다가, 그러면서 버텼다. 시댁 식구들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병치레 잦은 며느리를 반가워할 리가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내가 말문을 닫아 버렸다. 말문뿐이 아니라, 마음의 빗장도 걸어버렸다. 나 스스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큰 병을 앓는 것을 시어른들이 아셨는지 모르셨는지, 그걸 나는 지금도 모른다. 모른 채, 사는 게 낫다 싶다.


작정하고 말문을 닫은 것은 아니다. 자연스레 그리 되었다. 시댁 식구들은 대부분 몸이 튼튼했고, 여간해서는 아프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특히 큰 시누이는 나보나 네 살 정도 나이가 많았는데, 일찍 결혼해서 살림을 해서인지 뭐든지 뚝딱이었다. 시금치를 데쳤나 하면 잡채가 되고, 무를 썰었나 싶으면 곧바로 깍두기가 나오고, 열무를 씻나 싶으면 열무김치가 나오고. 무슨 음식이든지 척척 해냈다. 집안일도 마찬가지였다. 대청소를 하면 집안을 홀랑 뒤집어놓다시피 말끔하게 치웠고, 냉장고 청소도 깔끔하게 해치웠다. 시어머니는 무척 흡족해하셨다. 그걸 보고, 나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고 단정 지었다. 시부모에게 칭찬받으려고 집안일하는 것은 단념해 버렸다. 그걸 알아서인지, 시댁 식구들은 나에게 무심한 듯했다. 자업자득이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남편이 인천으로 가고 난 후 언젠가부터, 방에만 들어가면 어디서 인지 개미가 출몰했다. 날이 갈수록 점점 숫자가 늘어났다. 특히 따뜻한 아랫목이 더했다. 시부모님께 말했는데도 시큰둥하셨다. 대수롭게 여기지 않으셨다. 각자도생이라 했던가, 내가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장판을 살며시 걷어보니 개미떼가 새까맸다. 급한 마음에 개미를 태워 죽이기로 했다. 장판을 조금 걷어내니 시멘트 바닥이 드러났다. 시멘트 바닥 위에 화장지를 얇게 펼치고 성냥을 그어댔다. 불길이 방바닥 끝에 닿아있는 벽지에 붙었다. 재빨리 수건으로 눌러서 불을 껐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옛말이 그냥 있는 말이 아니었다. 개미 잡으려다 방 한 칸 불태울 뻔했다. 한 밤중에 이 소동을 치르고 나니,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이불속에서 숨죽여 울었다. 나는 나 스스로 시댁과 거리감을 둔 것은 탓하지 않고, 시댁 어른들의 무심함에 서럽기만 했다. 참 철없고 못난 짓이었다.


갈 곳이 없었다. 퇴근하여 시가에 가도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시골 살이가 그렇듯 할 일은 많았지만 나는 일거리를 찾아 하지는 못했다. 학교 생활도 일상생활도 나날이 고단하였다. 그가 인천으로 가고 난 후부터 8월 말까지 약 7개월 간을 주말부부로 살았다. 처음 한 달 정도는 그가 본가로 왔다. 그때는 토요일도 근무하였기 때문에 그가 집에 도착하면 저녁때가 다 되었다. 시어머니는 토요일만 되면 음식준비로 분주했다. 남편만 오는 게 아니라, 가까이 사는 시작은아버지 내외분도 오셨기 때문에 토요일마다 작은 잔치상을 차리는 것 같았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시할머니, 시부모, 시숙부모, 시동생, 시누이, 때로는 시집간 큰 시누이까지 와서 시끌벅적했다. 나와 남편이 함께 있을 시간은 그들이 모두 가고 난 뒤, 밤이 깊어졌을 때였다.


그다음 일요일은 또 다 같이 식사하느라 한 나절을 보내고, 그러고 나면 남편은 또 인천으로 갔다. 이렇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려고 결혼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주말에 내가 인천으로 가기로 했다. 예전에는 토요일 오전 근무였다. 토요일, 수업이 끝나는 대로, 나는 대전 신탄진역으로 갔다. 영등포역까지 통일호인가 무궁화호인가 기차를 타고 갔다. 영등포역에서 1호선 지하철을 타고 동인천역까지 간다. 총 4시간 안팎 정도가 걸렸다. 동인천역에 오면 그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세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 단 한 명, 그가 나와 있었다.

"왜 이렇게 야위었어?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거야?"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눈을 위로 치켜뜨고 눈에 힘을 주었다. 참기가 어려웠다. 아니라고 부정하면서, 그의 등 뒤로 얼굴을 돌렸다.


단칸방, 연탄보일러, 비키니 옷장, 책상 하나, 대전역 중고점에서 산 조그만 흑백텔레비전, 찻상으로나 쓸 만한 작은 밥상, 그릇 몇 개, 수저 젓가락, 이게 첫 세간살이 다였다. 부족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와 함께 몇 시간을 보내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는 나를 데리고 인천의 여기저기를 데리고 다녔다.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는 자유공원, 월미도, 인천항, 등등. 어디가 되었든 그와 함께라면 족했다. 남편과 함께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이 되면 둘 다 학교로 출근을 하였다. 나는 인천에서 대전 신탄진역으로 가야 해서 둘 다 일찍 일어났다. 이른 아침, 동인천역에서 헤어질 때면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가 없는 곳은 어디든 불편했고 낯설었고 두려웠다. 이쯤 되면 질병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던 중, 마침내 둘의 바람이 이루어졌다.


1990년 8월 말, 기다리던 '인사발령통지서'가 왔다. 인천시교육청 소속 초등학교로 전출하라는 통보서. 남편 없이 지낸 시가살이 7개월 만에,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 추울수록 더 진하고 큰 꽃잎을 피운다는 동백꽃, 나는 그 어여쁜 동백꽃이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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