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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지영 Jan 13. 2023

고마우신 분들

(1990년대 육아 체험기)

    (사진출처 : 인터넷)

   내 인생을 돌이켜 볼 때, 감사드릴 분이 여럿 계신다. 그중에서도, 내가 학교에서 맘 놓고 교사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나의 큰딸 다영(가명)이를 돌봐주신 분들! 다영이가 태어나고 나의 출산 휴가가 끝나고 출근을 해야 하는데, 시터를 구해야 할 고민에 빠져 있었다. 평소 집과 학교만 왔다 갔다 했기 때문에 이웃사람과의 교류가 없어서 혼자 끙끙 앓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5층에 사시는 아주머니가 우리 집을 방문하셨다. (우리 집은 같은 라인 3층이었다.)

  "혹시 아기 돌봐줄 사람 구하셨어요?"

  "아뇨, 제가 출근을 해야 하는데, 큰일이네요. 혹시 해주실 분 알아봐 주실래요?

  "그럼, 제가 하면 안 될까요? 제가 해 볼게요."

  5층에 사시는 분과는 그간 친분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다만 같은 계단을 사용하는 이웃이라 눈인사 정도만 하는 분이었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소형 아파트였다. 그분은 두 딸을 키우시는 분이었다. 두 딸과 아주머니 그리고 그녀의 남편이 늘 다정하게 지내시는 걸 본 적이 많아서 나는 곧바로,

  "고맙습니다. 그럼 우리 다영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침마다 젖병 대여섯 개를 소독해서 비닐봉지에 담고, 천기저귀 10여 개를 가방에 담고, 양쪽 어깨에 멘다. 그리고 다영이를 포대기에 싸서 안고 5층으로 올라갔다. 요즘 사람들은 일회용 기저귀를 많이 사용한다는데, 내가 읽던 육아 책은 천기저귀가 아기 몸에 좋다고 해서, 그대로 따랐다. 혹시 분유나 기저귀가 필요하면 가져가시라고 우리집 열쇠를 시터에게 맡겼다. 그렇게 다영이를 5층으로 보낸 후, 3층 우리 집으로 내려오면 겨울에도 땀이 났다. 다영이를 시터에게 보내고 와서, 나는 출근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퇴근하고 곧바로 다영이를 데리고 와서 천기저귀를 세탁기에 돌리고 가스레인지에 삶고, 젖병을 소독해서 분유를 타서 먹이고 그렇게 키웠다. 남편은 중등교사라서  퇴근이 늦었다. 그렇더라도 그 또한 다정한 사람이라서 틈만 나면 놀아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저렇게 시간이 가서 다영이가  무렵 걸음마를 시작하고 잘 성장해 갔다. 첫아이라 어떻게 키울지 고민하던 나에게 시터는 큰 도움을 주었다. 아이를 둘이나 키운 노하우를 나에게 많이 전수해 주었다.


  어떤 이들은 어린아이를 '놀이방'에 맡기기도 했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유아를 돌보는 놀이방은 여러 아기들을 돌보기 때문에 비용이 다소 적게 들기는 했다. 한 명만을 돌봐주는 시터의  경우엔 비용이 더 들었다. 그렇더라도 나는 시설이 아닌 일반 가정집의 분위기에서 우리 아이가 지내길 바랐다. 우리 아이에게만 집중해서 돌봐주길 원했다. 다영이가 네 살 무렵이 될 때까지 처음 돌봐준 시터에게 계속 맡겼다. 휴일이면 남편과 나는 집에서 쉬고 싶어 바깥나들이를 잘하지 않았는데, 다영이 시터는 자기 집 가족 여행까지도 다영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돌봐주었다. 인천의 곳곳으로 나들이 갈 때, 다영이를 데리고 다니셨다. 덕분에 어느  휴일에는 우리 부부가 편히 쉴 수가 있었다. 그 시터에게는 딸이 둘이 있었다. 다영이에게는 모두 언니뻘이었다. 그래서 다영이는 여러 가족 사이에서 자라는 관계로 말을 빨리 배우게 된 것 같았다.


  그렇게 백일전후에서부터 다영이를 돌봐주던 시터가 문방구를 개업하게 되었다. 다영이가 네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다른 시터를 구해야 했다. 첫 시터께서 다른 분을 추천해 주었다. 바로 같은 계단을 사용하는 1층에 사시는 분이었다. 남편과 함께  중학생 딸 하나를 키우시는 분이었다. 우리 집이 3층이라 올라가다 눈에 들어오는 그 집안은 늘 조용하고 깔끔하게 정돈된 분위기였다. 추천해 주시는 것을 믿고, 바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다영이는 이제 1층 시터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1층에 사시는 시터는 음식 솜씨가 대단했다. 젊은 분이 집에서 강정, 식혜, 수정과, 약식을 비롯한 각종 떡 등을 만들 정도였다. 시터의 친정 조상 중에 어느 분이 옛날에 궁중 수라간에서 일하시던 분이라고 했다. 그 요리 솜씨가 대대로 전수되어서 그런지, 그분의 음식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때 내가 그분에게 요리를 배워두었으면 좋았는데, 지금 내가 요리를 못해서 이렇게 버벅대지는 않았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게 두 번째 다영이 시터가 살갑게 다영이를 돌봐주었다.


  어느 날인가, 두 번째 시터가 나에게 말하였다.

  "다영이 어머니, 다영이 한글 공부를 시키고 싶은데, 학습지를 하게 해 주세요."

  나는 다영이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일에만 신경 썼지, 한글 공부는 학교에서 배우는 걸로 여기고 있었다. 그때도 조기교육이다 뭐다 해서 많은 엄마들의 치맛바람이 거셀 때였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저 노는 게 최고다, 라는 것을 무슨 신념으로 여기고 살고 있었다. 시터의 말을 듣고 큰 자극을 받았다. 명색이 학교 교사인 내가 유아  한글교육에 관해 큰 관심이  없었다.  사설 학습지를 1층으로 배달시키고 여러 놀잇감을 구입해다 주었다.


  어느 날, 시터가 나에게 말했다.

  "다영이가 천재인 것 같아요. 얼마나 한글을 빨리 배우는지 몰라요."

  그래서 나도 다영이가 천재인 줄 알았다. 어느 날엔가 동화책을 줄줄 읽기 시작했다. 어린 다영이가 동화책을 읽어주면 내가 먼저 잠이 들 정도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모든 엄마들은 처음엔 자기 아이가 천재인 줄 안다. 나도 그랬다는 얘기다.


  어느 날, 창문을 열어보니 하늘에 솜털구름이 떠 있었다. 너무 예뻐서 다영이를 번쩍 안아서 보여 주었다.

  "다영아, 저기 구름 좀 봐. 예쁘지?"

  "응, 엄마, 구름이 하늘에 대롱대롱 달려 있어."

  나는 그게 대단한 시적 표현이라고 여겨서 다영이가 시인이 되려나 했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그걸 얘기했더니, 그래? 정말 우리 딸이 시인이 되려나보다, 하며 맞장구를 쳐주어서, 나는 육아에 신바람이 났다.


  그렇게 그렇게 우리 큰딸을 키우다가 이제 여섯 살이 되었다. 이제는 뭔가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보내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알아보니 내가 다니는 학교 근처에 종교계 어린이집이 있었다. 어린이집 원장이 목사님의 딸이라고,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 원장님의 눈빛 하나하나 손길 하나하나가 사랑이 듬뿍 담겨 있는 것 같아, 거기로 정하였다. 원장님을 비롯한 여러 어린이집 선생님들도 참 다정하였다. 그것도 좋은 인연으로 이어졌다.


  퇴근 후, 다영이를 데리러 가서 현관문을 열면, 딸랑딸랑 종소리에 실내에 있던 여러 아이들이 중문으로 몰려오곤 했다. 엄마의 퇴근을 기다리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귀엽기도 했지만, 안쓰럽기도 했다.

  "미안해. 나는 다영이 엄마야. 너희들 엄마도 곧 오실 거야. 추우니까 얼른 들어가."

  라는 말을 남기고 다영이를 데리고 나오는 길은 얼마나 행복하던지. 어린이집을 나와 집으로 오는 길에 다영이는 그날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잘도 얘기했다. 다영이를 돌봐주던 그분들께도 감사드린다.


  그렇게 해서 큰딸 다영이는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내가 근무하는 초등학교로 입학하게 되었다. 다영이를 돌봐주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감사합니다.(꾸벅) 덕분에 우리 다영이가 어린 시절을 잘 보냈습니다.' 이렇게, 지금의 내가 된 것은 나 혼자만의 노력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에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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