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만드는 데 있어 마냥 즐겁고, 재밌고, 행복한 시간만을 보낼 수 있을까? 보통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주변을 조금만 둘러봐도 창작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부터 가볍게 취미로 무언가를 만들어보는 사람들까지 모두 크고 작게 고통받고 있다.
롤랜드를 운영하는 우리도 자주 고통받는다. 글을 쓰다가, 디자인을 하다가, 회의를 하다가 머리를 쥐어뜯어본다. 나뒹굴어도 본다. 그래봤자 머리에선 먼지 한 톨 같은 아이디어도 날리지 않는다. 가끔 머리를 퉁, 하고 때리면 반대쪽으로 통, 하고 아이디어가 굴러떨어졌으면 하는 상상을 한다. 이 말은 창작의 고통보다는 신체의 고통을 견디는 편이 차라리 낫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한다.
창작의 고통을 반복하던 어느 날엔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창작에서 고통이 빠진 적이 별로 없었다면, 고통은 그냥 창작의 단계 중 하나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 창작마다 고통이 1단계일 수도 있고, 마지막 단계일 수도 있겠다. 어찌 되었건 '운 좋으면 생략 가능'이라 덧붙여져 있기는 하나, 보통 운이 따라주지 않아 대개는 겪어야 하는 창작의 어떤 단계가 바로 고통인 것이다. 그리고 어떤 단계든 그렇듯, 거쳐야만 다음 단계에 도달할 것이다.
즉, 고통은 창작의 재료 격일지도 모른다. 창작을 해내는 데 필요한 준비물 같은 것. 빵을 구우려면 반죽이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어쩌면 당연한 단계.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나았다. 그냥 준비물 담듯이 조금은 무덤덤하게 고통을 가방에 넣는 것을 상상했다.
물론 말이야 쉽지, 무덤덤하게 고통을 감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어떠한 사실은 완전히 깨달아버려야 한다. 아프다고 소리칠수록 고통은 더 커진다는 사실 말이다. 언젠가 상처가 났을 때 야단법석을 떨어 더 아팠던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상처를 담담하게 참아내는 것이 딱 상처만큼의 고통만 겪는다는 걸 자연스레 알게 된다. 그러므로, 다시금 담담하게 고통을 가방에 담아보자. 그러지 않으면 순간순간 '내가 뭐 하러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지?'와 같은, 엄밀히 말하면 창작과는 관계없는 부가적인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시간이 해결할 상처를 굳이 건드려 곪게 만드는 것과 다름이 없게 된다.
그래서 요즘은 정말 순수한 창작의 고통만 겪기 위해 노력한다. 속으로라도 '지금 내가 뭐 하는 거지?'와 같은 지금의 창작과 관계없는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냥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이 콘텐츠가 더 쉽게 읽힐 수 있을까?' 같은 생각으로 얼른 전환해 불필요한 고통의 싹을 덮어버리곤 한다.
고통이 창작의 재료라고 생각하게 된 이후 확실히 고통의 지속시간이 덜 해졌는데, 고통이 시작되는 순간 이미 창작의 단계로 들어섰다는 이상한 확신이 생겨버려 고통이 줄어 버리는(?) 예상치 못한 효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아 참, 생각해 보면 이상한 확신이 아니다. 고통이 시작되었다면 창작이 시작된 것이 맞다. 그것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