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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아웃 보고서 1

by 로그아웃아일랜드

최근, 로그아웃이라 느꼈던 순간들을 간단히 정리해 봤습니다. 알고 보니 로그아웃은 생각보다 더 가까이, 자주 있었습니다.




1.

오랜만에 방 배치를 바꿨습니다.


타지에 살다 고향집 내 방으로 돌아왔는데, 그렇게 아끼던 방임에도 불구하고 낯선 감정을 느꼈습니다. 이십 년 가까이 사용하던 내 물건들이 모두 남아있었지만 괜히 데면데면했습니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나의 손길을 방 곳곳에 묻히기로 결정했습니다.


방 배치를 바꾸는 일이란 굉장히 수고로운 일입니다. 물건을 옮기고, 옮긴 자리에 오래 자리했던 먼지들을 훔치고, 닦아내기까지 해야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것도 일종의 ‘환기’인 것 같습니다. 몸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개운해지는 느낌을 받거든요.


어차피 내 방이니까, 이상하고 엉뚱하게 배치를 해봅니다. 일반적이지 않은 배치가 성공적일 때마다 신이 나고 즐겁습니다. 이것저것 정리를 마무리하고 나니 달라진 모습에 내 방이 아닌 것 같다가도 내 방 같고 그렇습니다. 확실히 손이 이곳저곳에 닿으니 방에 나의 애정이 물씬 풍겨납니다. 매일 앉던 책상이 달리 느껴집니다. 왠지 책도 더 잘 읽히는 것 같습니다. 모처럼 방과 내가 다시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2.

약속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주 듣는 플레이리스트가 있습니다. 보통 밤에 듣기 때문에 대체로 잔잔하고 담담한 노래들입니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 영업을 끝내고 어두워진 상가들이 모여있는 거리, 몇 개 없는 가로등 아래 좁은 골목길과 잘 어울려요.


평소에는 괜찮은데, 가끔 그런 노래들이 슬프게 들릴 때가 있습니다. 최근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돌아가는데, 흘러가버린 세월에 묘한 허망함을 느꼈어요. 나눈 대화들은 우리를 그때 그 시절로 훌쩍 데려다 놓았고, 하나하나 기억을 짚어볼 때마다 꺄르르 거리며 행복해했지만 그 시절과는 사뭇 다른 우리의 요즘에 대해 얘기할 땐 자주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곤 했거든요.


그래서 항상 듣던 귀갓길 플레이리스트를 끄고 그 당시 우리가 듣던 노래를 틀어봤어요. 노래방에 갈 때마다 함께 부르던 애창곡을, 하굣길에 버스에서 듣던 그 당시 락 발라드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조용한 밤의 무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곡들이었지만 훨씬 기분이 나아졌어요. 대화로는 추억에 그저 아련해지기만 했는데, 당시의 음악을 통해 기억이 아주 생생해져서 정말 그 시절의 나와 네가 된 새로운 기분이었습니다. 그때의 우리처럼 걱정이 다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3.

몇 달 전 난생처음 탈색에 도전했어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탈색을 시도함으로써 ‘안 해본 일에 도전하는 도전’의 스타트를 끊었어요. 앞으로 해온 일보다 안 해본 일을 더 많이 해야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겉으로는 남들과는 다른 시선과 생각을 갖고 있으며 도전적이고 용기 있는 사람인 척 굴었지만, 사실 저만큼 시도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주저함이 많은 사람도 없을 거예요.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고민하다 지쳐서 결국 도전을 포기하고, 결정을 번복하곤 했죠. 걱정과 불안은 또 왜 그리 많은지. 머릿속으로는 세상 대단한 계획들을 세우지만, 그 머리 바깥에선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요. 망상만 하는 바보가 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 같은 사람은 이런 트리거가 필요합니다. 일단 시작은 했구나 하는 기분을 유발해 줄 수단이 필요해요. 그래서 앞으로의 모든 도전의 첫 타자를 지목해야 했습니다.


누가 보기엔 대단한 일도 아닌 탈색이지만요, 저에겐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고 결국 해냈습니다. 아주 임팩트 있는 시도였어요. 제가 한 건 겨우 전문가에게 머리를 내주는 일뿐이었지만요. 거울을 볼 때마다, 창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볼 때마다 어색해서 웃음이 나왔어요. 모처럼 제 얼굴을 뚫어져라 보는 시간이었네요.


네, 그래서 저는 탈색 이후 여러 가지를 더 해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연장선상에 있어요. 탈색 머리 아래로 검은 머리가 자라온 시간만큼 저는 크고 작은 결정과 선택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저에게 탈색은 일종의 ‘선포’였습니다. 다른 누구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시작을 알리는 선포였어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생소한 제 모습을 마주칠 때마다 나는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했음을 다시 상기했습니다. 그것을 잊지 않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다음 단계로 나아갈 힘이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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