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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경력을 단절한다는 것

by 로그아웃아일랜드

얼떨결에 첫 회사의 분야가 내 직업이 되었다. 취업 압박은 내 뒤를 바짝 쫓아오는데 급하다고 내키지 않는 전공을 살리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타 전공으로 눈을 돌려본다거나, 직업탐색을 할 겨를도 없이 주변의 조언대로 '전공 무관' 공고에 지원을 했다. 그렇게 다니게 된 첫 회사는 다행히도 좋은 회사였지만, 오래 염원하던 꿈같은 직장은 아니었기에 곧 부작용이 생겼다. 동종업계에서 이곳저곳으로 이직하며 한 분야에 5년 이상 몸을 담고 나니 나중엔 입만 살아 '이쪽 업계는 안 돼!'라고 밤마다 주정을 부리곤 했다. 그러고 아침에 되면 혼이 나간 얼굴로 체념한 채 출근을 했다.


그랬으니 한 번쯤 미칠 법도 하다. 우연히 접한 아르바이트 공고에 합격하여 잘 다니던 회사를 퇴사했다. 새 일터에 출근해 보니 난생처음 겪는 업무와 공간이었다. 흔하지 않은 특수업종이라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그래서 더 신나고 즐겁기도 했다. 이직을 통해 많은 공간을 겪었지만 이번 공간에선 유난히 환기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알바생으로 시작해 정직원이 되었고, 또 몇 년이 흘렀다.


하던 일이 트렌드에 민감하고 변화가 많은 편이라 일 년 만 쉬어도 열심히 쌓아온 경력이 쉽게 흔들리곤 했다. 주변인들 모두 늦기 전에 이전 분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거라 얘기했다. 그런 얘기에 초조해하면서도 왜인지 일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한동안은 사람들의 조언이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내가 원래 무슨 일을 했었는지 점점 잊어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잘 지내는 모습에 조금씩 안심하는 눈치였다. 주변인의 시선이 안정적여졌다는 것은 내 입지에 중요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퇴사한 지금, 내게는 '경력단절'에서 오는 자유로움만이 남았다.


첫 직장을 시작으로 나는 등 떠밀리듯 내게 정해져버린 분야에서 달려야 했다. 달리는 도중 길가에 가득한 세잎클로버들 중 혹시 네잎클로버가 있는지 찬찬히 살펴보고 싶을 때마다 내 지난 경력들은 니가 그럴 때냐며 나를 밀어댔다. 이 분야에서 잘나가는 사람들은 이런 기술들을 배우고 저런 지식을 쌓으며, 업계의 사교 모임을 나가 인맥을 만든다는데 너는 뭐 하고 있는 거냐 다그치면서 말이다. 세상에 재밌기만 한 업무가 어딨냐며 나를 에워싸는 주변인의 머리들 사이로, 정말 재밌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며 돌아나가는 누군가의 호기심 어린 뒷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쓸쓸한 얼굴이 되곤 했다.


이제야 오랫동안 경력단절을 깊이 원하고 있었음을 확신한다. 해온 일을 접고 새로운 일을 배워가는 동안 나는 내내 불안했다. 1년 안 또는 못해도 2년 안엔 돌아와야 한다던 말, 3년 넘어가면 그냥 이전 경력은 말짱 도루묵 되는 거라고 보면 된다던 말.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그냥 시간이 지나길 바랐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지난날을 바라보며 '이젠 어쩔 수 없네'하고 시간만 탓할 수 있길 바랐다. 만약 남들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업계로 돌아갔다면 나는 과연 누구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남이 되었건, 나 자신이 되었건 말이다.


족쇄같았던 이전 경력에서 풀려난 나는 예상보다 더 자유로워졌다. 이 자유로움은 다방면으로 영향을 미쳐 많은 것을 산뜻한 시선으로 보게 했다. 평범한 삶도 불안정할 수 있고, 독특한 삶도 안정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관성에 사로잡히지 않기로 했고, 모든 이의 새로운 도전에 순수하게 경의를 표할 수 있게 됐다. 시선의 변화를 만들어 갈수록 나만의 기준이 선명해짐을 느꼈다.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알바생이 되겠다 마음먹던 몇 년 전의 그날, 알바 합격 전화를 받고 첫 직장 합격보다 훨씬 기뻐했던 그날을 기억한다. 어쩌면 나는 이 순간부터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던 건 아닐까. 많은 이의 걱정에 수긍하지만 수긍하지 않으며, 초조하지만 초조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경력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단절'한 것'이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누구와의 상의도 없이 경력을 단절한 그날 이후, 나는 내가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최근 새로운 도전을 위해 나는 또 경력을 단절했는데, 확실히 이전보다 쉬웠다. 다른 경력들 대신,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경력이 쌓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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