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늘 어렵다. 약속 시간 전에 슬슬 씻기 시작해야 하는데 머릿속으로 남은 시간을 계산하며 최대한으로 미루어 본다. 홈트를 슬슬 시작해보려고 매트 위에 앉았는데 운동 영상을 재생 직전 눈에 띈 다른 영상들을 보느라 한참 뒤에야 시작한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 일단 시작만 하면 뭐든 진전은 있을 테고, 하기 전보다 마음이 훨씬 개운할 것이란 걸 안다.
그럼에도 시작은 늘 어렵다. 이유는 직전에 하던 아주 편안한 활동을 끊어내야 한다는 점 때문이 아닐까. 이를테면 온몸에 근육을 쫙 풀고 뜨끈한 전기장판 위에 누워있는다던가, 보던 영상이 끝나면 자동으로 더 재밌는 다음 영상이 재생된다던가 하는 것들 말이다. 시작하는 모든 일들이 이 편한 것들보다 즐거울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 편안한 활동을 조금은 쉽게 끊어내는 방법을 얼마 전에 터득하게 되었다.
몇 달 전 동료에게 룸 스프레이를 선물 받았다. 평소 향수나 디퓨저 같은 것을 사용하지 않는 편이지만 선물 받은 거라 꼭 필요할 때만 뿌려야지 하고는 책상 앞에 두었었다. 하루는 여느때와 같이 할 일을 너무 하기 싫은 마음으로 책상에서 딴 짓을 하다 마침 스프레이가 보이길래 아무 생각 없이 책상 위 공중에 스프레이를 칙-뿌려봤다.
순간적으로 향긋함이 책상 주위를 두둥실 감쌌다. 향기가 퍼져가면서 마치 트랜스포머가 변신하듯 책상 공간의 가구 하나하나가 비틀리며 완벽한 작업 공간으로 만들어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향기가 가장 강할 때 일을 시작해 점점 희미하게 흩어질 때까지 오랜만에 꽤나 촘촘한 집중력을 유지했다. 그 이후로 나는 책상에 앉아 뭔가를 시작할 때마다 룸 스프레이를 공중에 칙- 뿌렸다. 어느새 이 향은 나에게 ‘시작한다’의 의미가 되어버린 것이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뿌리는 상황마다 향기를 달리하면, 향이 만들어주는 공간감이 재빨리 내가 원하는 그 지점으로 데려가지 않을까? 자기 전에 생일선물로 받아놓고 고이 모셔놓던 슬리핑 미스트를 찾아 베개와 이불에 칙칙 뿌려봤다. 그리고 핸드폰을 보지 않고 잠들어보려 노력을 해봤다. ‘자아, 이 향기를 맡으면 너는 그냥 자는 거야.’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는 것처럼. 놀랍게도 향기에 집중하며 평소보다 일찍 잠이 들었다. 어떤 것이든 시작 시간을 늦추던 내가 파블로프의 개처럼 향기만 맡으면 집중하는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스스로도 새삼 놀라웠다.
나는 이제 운동하는 매트 옆에 향수를 갖다 놓고 운동 전에 뿌리고 시작한다. 청소를 할 때는 창문을 열어놓고 향을 하나 피운다. 향기가 콧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보기엔 아무 것도 시작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미 일을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다.
영화 속에서 평범한 인간이던 히어로들은 중요한 순간에 재빨리 슈트로 갈아입고 엄청난 힘을 가진 영웅으로 변신한다. 히어로들의 슈트가 주는 힘을 우리도 비슷하게 가질 수 있다. 바로 시작 전 나만의 트리거(Trigger)를 갖는 것이다. 눈을 질끈 감고 억지로 하는 것 대신 내가 좋아하는 향을 공중에 뿌리는 행위로써 시작의 방아쇠를 당겨본다면 어떨까. 일단 그렇게 시작만이라도 한다면 몰입의 순간으로 들어가는 건 너무나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