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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Sep 21. 2018

뇌섹녀와 츤데레의 사랑

영화 <Beauty and the Beast> (2017)

  작년에 본 영화 <미녀와 야수>를 한번 더 봤다. 1991년에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보고, 2004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공연한 뮤지컬도 봤다. 이 극과 극 커플은 딱히 내 취향은 아니지만, 새로운 장르와 버전이 나올 때마다 안 볼 수 없게 하는 매력이 있다. 새로운 벨이 된 엠마 왓슨(Emma Watson)은 애니메이션과 뮤지컬 그리고 다른 버전의 실사 영화를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당찬 벨이라 생각한다. 페미니스트인 그녀의 이미지도 무시할 수 없는 아우라로 작용했을 것이다.  



아버지 모리스와 벨


  벨은 18세기 프랑스 시골 마을에서 빨래와 집안일을 하고 몇 권 안 되는 마을 도서관 책을 마르고 닳도록 읽는, 똑똑하고 당당한 21세기형 미인이다. 간혹 그녀가 당차긴 하지만 예쁘장한 전형적인 동화 속 여주인공에서 못 벗어났다는 비난도 들린다. 벨은 작은 동네를 답답해며 넓은 세상을 꿈꾸지만, 그녀가 진출한 넓은 세상이란 게 고작 야수의 성이다. 또 저주받은 오만한 왕자가 결국 마을에서 가장 예쁜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게 내면의 아름다움을 얘기하는 이 영화의 한계라는 지적도 있다. 그렇다면 당찬 벨이 야수의 성을 도망쳐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모험하거나, 야수가 벨이 아닌 평범한(?) 미모를 지닌 여자와 사랑하는 걸 보고 싶은 걸까?


무식한 남자의 대명사 가스통


  18세기 작은 동네에서 자란 소녀의 세계관이라는 게 넓으면 얼마나 넓을 수 있을까. 벨은 책을 읽어서 상상력이 풍부하고 다른 세상을 꿈꾸는 비전을 갖게 된 것이다. 그녀가 진정 아름다운 것은, 마을 사람들이 괴짜라 놀려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도 자기가 예쁜 걸 알 것이다. 남자들 칭송에 우쭐해하며 좋은 남자 만나 안락하게 사는 삶을 꿈꾸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벨은 책을 통해 사고를 확장시키는 걸 멈추지 않는다. 익숙한 세상이 줄 수 없는 미지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은 그녀를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가 된다. 그녀가 꿈꾸는 다른 세상은 지루한 동네 밖을 뜻하는 게 아니다. 지금과는 다른 방식의 삶이다. 아마 그녀도 그게 어떤 삶인지는 구체적으로 몰랐을 것이다. 뭔지 모르지만 지금과는 다른 것, 누군지 모르지만 익숙한 동네 총각이 아닌 다른 사람을 꿈꾸는 소녀에게 기회는 위험을 빙자해 찾아온다.  


벨을 연기한 엠마 왓슨


   벨이 야수의 성으로 달려간 것은 효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것보다 더 강력한 내면의 동기는 이제껏 살아왔던 곳이 아닌 다른 곳, 늘 보던 동네 사람들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기대하는 마음속 꿈틀거림에 기인하지 않았나 싶다. 그녀는 생명이 있는 촛대와 시계와 주전자를 보며 놀라지만 무난하게 적응한다. 기절초풍하듯 놀라며 도망치는 늙은 아버지와 달리, 호기심에 눈이 더 반짝인다. 성 전체가 마법에 걸려 말하는 사물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걸 알고 탈출 시도를 멈춘다. 곱게 자란 겁 많은 처녀였다면 난리 났겠지만 벨에겐 상상도 못했던 이 상황이 오히려 삶의 패러다임을 바꿀 기회로 보였을 것이다.


마법에 걸린 성의 식구들


  야수에게 느낀 연민과 애정은 벨 자신도 예상치 못한 생을 전환시킬 기회로 작용한다. 그녀가 야수에게 애정을 갖게 된 계기는 서고의 책을 마음껏 읽어도 좋다는 허락이다. 일단 많은 책을 갖고 있는 남자는 벨의 이상형에 근접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벨의 이상형은 가스통처럼 뺀지르르한 얼굴로 힘자랑만 하는 남성주의자가 아닌, 외모와 상관없이 박식하고 유머러스한 남자다. 야수의 유머감각은 그리 뛰어나다고 볼 순 없지만 그에겐 지적인 순수함이 있다. 물론 오만함도 함께. 책을 빌려준다는 것은, 자신이 아는 세상을 나누어 갖겠다는 의미다. 적어도 벨에겐 그렇다. 그녀가 꿈꾸고 지향하는 삶은 책속에 있다. 야수의 서고는 벨이 어쩌면 평생 갇혀 살지도 모르는 성을 또 하나의 거대한 세상으로 만들어줄 가능성이 있다. 비록 아버지를 못 보고 자유가 없긴 하지만, 책은 벨의 숨통을 틔어준다.


사랑을 느끼며 춤추는 미녀와 야수


  벨은 성이나 왕자가 아닌, 자신의 소신에 따라 사랑을 택한다. 야수가 준 멋진 옐로 드레스를 입고 춤추는 건 예쁜 여자의 한계를 드러낸 게 아니라, 그녀가 자신의 파트너를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즐길 줄 아는 여자임을 증명한 것이다. 그리고 후회 없는 사랑을 위해, 죽어가는 야수 앞에서 고백까지 한다. 벨의 행동반경은 마을과 성과 숲길뿐이지만, 그녀의 소양은 야수로 인해 무한 확장된다. 자신도 미처 몰랐던 용기와 아량, 시험에 들지 않으면 깨닫지 못했을 인내와 연민까지. 야수는 그녀를 물리적으로 구속했지만 정신적으로는 확장시켜준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믿었기에 그녀를 자유롭게 해준다. 벨에게 사랑은 자유지만, 야수에겐 구속이었다. 야수가 사랑의 정의를 전복하자 벨 또한 사고를 전환한다.


  18세기 페미니스트이자 '로미오와 줄리엣'에 열광하는 낭만주의자 벨은 실수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모던한 페미니스트다. 요즘이라면 어렵지 않겠지만,  그 당시에 츤데레 야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생의 모험일 수밖에 없다. 이 뇌섹녀에게 열린 사고와 해방 정신이 없었다면 아름답고 매혹적인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디즈니는 어마어마한 수익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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