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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Sep 26. 2018

 강요하지 않으면 더 좋은 눈물

영화 <행복 목욕탕> (2016)

  가끔 내가 지금 영화를 보고 있다는 번뜩이는 자각을 할 때가 있다. 화면에 몰입한 와중에도 문득 냉정해져 시계를 보거나 스치듯 딴생각을 할 때가 그렇다. 간만에 본 일본 영화 <행복 목욕탕>은 지루하진 않았는데, 나를 종종 냉정해지게 했다. 내용은 아주 모범적(?)이다. 눈물을 쥐어짜라고 대놓고 다그치는 듯한 장면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이런 빤한 신파가 주는 카타르시스도 있다.    


엄마 후바타와 딸 아즈미


  일단 이 영화에는 강하면서도 짠한 모성을 모아 놓은 듯한 엄마가 등장한다. 후바타(미야자와 리에)는 자신이 낳지 않은 딸들을 키우며 사는데, 말기암으로 죽을 때까지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신파와 감동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중학생 딸 아즈미를 홀로 키우는 그녀는 여리한 이미지와 달리 꽤 강단 있는 엄마다. 딸이 학교에서 왕따 당하자 피하지 말고 맞서라 다그친다. 안쓰러워할 법도 하지만 여기서 피하면 앞으로 계속 도망 다닐 수밖에 없다며 딸을 무섭게 몰아세운다. 결국 엄마의 의도대로 딸은 왕따 문제를 극복한다.  


철없는 남편 가즈히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후, 파칭코 한다고 집 나가 10년 넘게 돌아오지 않는 남편 가즈히로(오다기리 죠)를 찾아 제자리에 데려다 놓는다. 그 사이 그가 다른 여자와 낳은 딸 아유코도 함께 떠맡는다. 아즈미에게 틈틈이 익히게 한 수화는 딸의 생모가 청각 장애인이어서 그렇다는 게 나중에 밝혀진다. 사실 후바타도 친엄마에게 버림받은 전사가 있다. 그녀는 대물림되는 운명에 복수하듯 자신이 낳지 않은 딸을 정성껏 키웠다. 또한 친엄마를 그리워하는 어린 아유코까지 감싸 안는다.


큰 딸 아즈미의 생모를 만나러 간 후바타와 딸들


  후바타는 죽기 전에 자신을 버린 엄마를 찾아가지만 만나길 거부당하자 먼발치에서나마 얼굴을 본다. 큰 딸을 생모와 만나게 해 주고, 여행지에서 알게 된 청년에겐 삶의 목표까지 넌지시 던져준다. 자신이 없는 세상에서 철없는 남편과 딸들이 살아갈 방편으로 예전에 닫은 '행복 목욕탕'을 다시 열기까지 한다. 죽기 전에 생의 임무를 완수해 내려는 듯 이 모든 것에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러면서도 죽기 싫다고, 더 살고 싶다고 울부짖는다. 그녀를 인간적으로 이해하지만 이런 감동과 눈물 포인트가 이 영화를 상당히 신파로 만든다. 10년 넘게 부재중이었던 남편을 받아들이는 것도, 그 남편이 밖에서 낳은 아이를 품는 것도, 자신이 낳지 않은 딸을 키우며 수화까지 익히게 한 것도, 한 사람이 지닌 아량으로 이해하기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큰 갈등없이 이상적이다. 게다가 황당할 정도로 무능하지만 멋지고 순한(?) 남편 가즈히로는 후바타의 남편이 아니라 그냥 배우 오다기리 죠로 보였다. 연기를 못했다는 게 아니라, 너무 독특한 개차반 이력 치고 순진하고 착하기까지 한 캐릭터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사실 일본 영화에서 이런 비현실적인 캐릭터는 자주 등장한다)


다시 문을 연 행복 목욕탕


  이 영화를 아무 생각 없이 보다 보면 몇 번이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너무 대놓고 강요해서 오히려 반감이 생길 정도다. 감동과 신파의 한 끝 차이가 무섭다는 걸 새삼 느꼈다. 이렇게 울리나 저렇게 울리나 사람 마음 후려치고 눈물 뽑아내는 건 마찬가지라 할지 모르겠지만, 강요해서 쥐어짜는 건 별로다. 뒷맛이 개운치 않다. 강요당했건 아니건 눈물은 비자발적으로 흘러내리지만, 저절로 흘러나오는 눈물은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머리도 맑게 한다. 굳이 말하자면, 이 영화는 저절로가 아니라 쥐어짜는 눈물을 많이 요구한다. 나에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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