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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Sep 29. 2018

N세대를 위한 미녀와 야수

영화 <EVERYDAY> (2018)

※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에서 본 영화입니다.


  300년 전 하이틴들은 어떤 콘텐츠를 소비하며 살았을까. 야수가 된 왕자와 착한 미녀의 사랑 이야기나 마녀의 저주로 수년간 잠든 공주 이야기는 어쩌면 17,18세기 하이틴들의 열광적인 소모품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한, 인류가 생산하고 소비하는 하이틴물은 버전을 업그레이드하며 끊임없이 반복 재생산된다. 굳이 하이틴물이라는 장르로 나눌 필요는 없지만, 이제 막 세상에 존재감을 드러내는 젊은이가 주인공인 이야기엔 외부에서 주입한 시련과 고뇌, 장애를 극복하려는 에너지가 필수 영양소처럼 들어있기 마련이다.


21세기 하이틴 '리아넌'


  21세기 하이틴 소녀는 더 이상 마녀의 저주나 흉칙한 야수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신분 차이나 인종 때문에 장애를 느끼지도 않는다. 최근엔 뱀파이어나 늑대인간 혹은 AI를 사랑한 적도 있지만, 이미 어느 정도 극복했다.


A의 컨디션-하루 동안 같은 나이 대의 불특정 신체에 머물고, 같은 사람 몸에 두 번 이상 머물지 않는다!


  십 대 소녀 리아넌(앵거리 라이스 Angourie Rice)이 사랑하는 상대는 실체 없이 자아만 있는 영혼 A다. 정확히 말하면 자아가 매일 다른 신체로 구현되는, 자신이 남자라고 느끼고 주장하는 영혼이다. 사랑의 가치를 숭고하게 할 시련과 장애는 이런 엄청난 비밀과 스릴이 되어 소녀 앞에 드러나고, 이제 선택은 네가 하라고 그녀에게 키를 넘긴다. 리아넌은 비교적 유연하고 경쾌하게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매일 다른 모습의 연인을 발견하는 스릴은 고독하지만 은밀한 쾌감을 동반하는 특권이다. 그러나 영혼이 통해도 신체가 교감하는 감각을 무시할 순 없다. 생각과 느낌이 통하지만 매일 다른 모습의 영혼과 지속적인 사랑이 가능할까?


A in 저스틴


  21세기 소녀가 갖게 되는 사랑의 시련은 외부가 아닌 자신의 내면에서 싹튼다. 그녀의 남친이 매우 특이한 컨디션을 가졌다는 건 세상이 주는 시련이지만, 극복 여부는 결국 그녀의 내면이 정하기 때문이다. 내적 사랑이 외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이상적인 메시지는 이미 <미녀와 야수>가 전해줬다. 벨의 먼 후손 리아넌이 오늘날 야수를 사랑한다면 그냥 취향이 좀 특이한 애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눈에 콩깍지가 씌면 가능한 일이다. 리아넌의 갈등은 좀 더 복잡하고 심오하다. 야수건 뱀파이어건 늑대 인간이건, 눈에 콩깍지가 씔 여지가 없다는 게 문제다. 매일 바뀌는 신체(외모, 성별, 인종)를 사랑한다는 건, 영혼의 교감으로도 극복하기 쉽지 않다. 사실 우리는 외모지상주의를 바람직하지 못하다 여기며 외모로 인한 차별을 혐오해왔다. 그러나 야수라는 정체성보다 매일 바뀌는 신체가 사랑의 걸림돌이 된다는 데 의의를 재기하긴 쉽지 않다.


A in 네이든


A in 자비에


  한국 영화 <뷰티 인사이드>에 나오는 이수(한효주) 언니만큼은 아니지만, 리아넌 역시 외모(or 신체) 차별을 한다. 그녀가 애정을 표현하며 좀 더 내밀한 스킨십을 하는 상대는 여자 모습으로 나타난 A가 아니다. 익살스럽지만 덩치가 큰 동양인도 아니다. 원래 남친이었던 저스틴을 제외하고 대체로 괜찮은 백인 남자아이로 구현된 A와 춤을 추고 키스하며 진도를 나간다. (아마 내일도 그 얼굴이길 바랄 것이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정신적 교감이 충만하면 여자나 다른 인종이라 해서 애정표현을 못할 리 없다. 물론 하루만 참으면 바뀌니까 리아넌이 애써 자제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애정 표현을 참는(?) 하루와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하루를 정하는 매커니즘에 외모(신체)가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는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그녀가 인종차별주의자나 외모지상주의자라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녀는 이 기막힌 현실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며 마음을 여는 긍정적이고 유쾌한 소녀다. 그녀가 미래를 얘기하며 걱정하는 A와 자연스럽게 이별하는 건, 어떻게 보면 이 사랑을 극복하길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21세기 소녀는 거침없이 사랑하지만, 포기하는 것도 합리적인 방편이라 여긴다.

 

A in 알렉산더


  만일 <미녀와 야수>의 벨이 끝내 야수를 사랑하지 않고 도망갔다면 그녀는 엄청 욕먹고 먹튀한 여자 취급받았을 것이다. 21세기 미녀는 매일 신체가 바뀌는 야수를 과감하게 포기하는 결단을 내린다. 심지어 야수가 정해준 인성과 외모가 모두 괜찮은 백인 남자와 안정적인(?) 사랑을 하려 한다. 그녀가 A를 저버리는 것은 그다지 문제 되지 않는다. 인스타그램이 있어도 영혼만을 사랑할 순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21세기 하이틴 로맨스는 해피엔딩인가? 잘 모르겠다. 나 같으면 이 엄청나게 특별한 사랑을 어떻게든 놓지 않을 것 같은데, 소녀는 동화 속 해피엔딩을 거부하고 현실적인 사랑을 찾아 주체적 선택을 한다. 그녀의 명민한(?) 선택이야말로 21세기 동화가 추구하는 진정한 해피엔딩일지도 모르겠다. 아쉬워하는 건 고전적인 동화의 선입견에 길들여진 어른일 뿐.

 

  이 영화는 외모를 극복하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영화가 아니다. 판타지 하이틴 로맨스라는 한없이 가볍고 달콤한 외피를 두른 채, 사랑의 정의를 다시 내리는 새로운 세대의 동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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