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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Oct 07. 2018

그때 그 오빠들은 어디서 뭘 할까?

영화 <나의 소녀 시대 Our Times> (2015)

  누구나는 아니지만, 대부분 사람들에겐 조금 특별한 학창 시절이 있다. 10대 중후반을 거쳐 20대가 되기 전, 몸과 마음이 따로 또 같이 자라며 호르몬이 분출하고 세상으로 나아가려 도약하는 고등학생 시기. 갑자기 농도가 짙어지고 부피가 늘어난 감정이 급격하게 표출되어 애먹기도 하지만, 평생 두고 꺼내볼 순수한 추억은 대부분 이 시기에 만들어진다.


린전신 (송운화)

  평범한 대만 소녀 린전신(송운화)의 빛나는 한때는, 1994년에 고등학생이 아니었던 사람도 공감하고 추억할 수 있게 하는 따뜻한 에피소드로 차고 넘친다. 유덕화 와이프를 꿈꾸지만 학교 킹카도 짝사랑하는 소녀. 두 남자를 향한 그녀의 열정과 순수는 너무도 익숙한 기시감에 꽤 자주 미소 짓게 한다. 그녀는 한때 세상을 휩쓸던 ‘행운의 편지’ 때문에 학교를 주름잡던 불량 학생 쉬타이위(왕대륙)에게 찍힌다. 그의 간식 셔틀이 되어 수난당하는(?) 것까진 낯 뜨거운 학원물 <꽃보다 남자>의 아류로 보였는데, 웬걸 클리셰를 온몸으로 뒤집어쓴 것 같은 둘의 썸에는 훌쩍 나이 먹은 예전의 소녀를 흠뻑 빠져들게 하는 마력이 있다.


쉬타이위 (왕대륙)


♥ 왕대륙, 대체 넌 누구냐!


  이 영화를 보기 전, 그의 이름을 종종 연예기사에서 봤다. 국내 여자 배우와의 염문 때문인데, 사실 여부를 떠나 관심 1도 없었다. 그건 지금도 변함없지만, 대체 이 마성의 고등학생을 찰떡같이 소화해낸 배우가 궁금하긴 하다.


  영화에서 '소녀'가 타이틀 롤인만큼, 그가 연기하는 쉬타이위는 소녀 취향에 최적화된 첫사랑의 전형 같은 캐릭터다. 거칠어 보이지만 내면의 아픔을 간직한 소년으로, 평범한 소녀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본능적으로 캐치해내는 심미안도 갖고 있다. (당연히) 비상한 머리와 실력을 갖고 있지만, 과거의 상처로 인해 굳이 발휘하지 않는, 진흙 속에 묻혀있는 진주 같은 남자라고 할까.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희생해 소녀의 순정을 지켜주고, 감정을 숨겨가며 그녀의 짝사랑을 응원하고 지지해준다. (이건 소녀 또한 마찬가지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이 유치한 캐릭터가 움직이는 화면을 보면 10대부터 60대 여자까진 거뜬히 커버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그에게 안 반하는 여자도 있겠지만(과연 그런 여자가 몇이나 될까), 적어도 그를 싫어하거나 무시할 수는 도저히 없을 것이다. 대체 첫사랑은 왜 다들 이렇게 신화적으로 완벽한 것일까!!


소녀시절 3인방


♥ 모든 소녀들에게 있는 그들만의 "오빠"


  린전신은 유덕화 빠순이다. (택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구체적으로 유덕화 와이프를 꿈꾼다. 이런 짓 안 해본 여자가 있을까. 나도 한때 좋아했던 미국 보이그룹 멤버 이름을 사전에 써갖고 다녔다. 'Mrs.000'. 내 동창 중엔 장국영을 너무 좋아해 중국어를 익힌 애도 있었다. 홍콩인이 쓰는 광둥어가 아니라 북경어를 배웠다는 걸 나중에 알고 좌절하긴 했지만. 그 당시 장국영이 부른 노래 발음을 한글로 적어 외우는 애들이 반에 몇 명씩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 사전에 쓰여있던 성을 가진 그 오빠는 지금 나에게 아무 감흥도 일으키지 못한다. 솔직히 그의 이름을 떠올리고 노래를 들어도 희미한 미소조차 지어지지 않는다. 소싯적에 좋아했다는 팩트만 기억할 뿐, 가뭄에 말라버린 논바닥처럼 싹 증발해버린 감정이 당황스러울 정도다.


린전신이 갖고 싶어하는 유덕화 입간판


  어른이 된 린전신은 학창 시절에 열광적으로 좋아했던 유덕화를 여전히 좋아해 그의 콘서트에 간다. 그 "오빠"는 린전신에게 단순한 연예인이 아니다. 그녀의 학창 시절을 관통하는 키워드이자 첫사랑의 매개체다.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영화에 카메오로 등장하는 유덕화는 그렇게 사용되고 있다. 그 시절 린전신이 표출하는 순수와 열정도, 그녀를 향해 쉬타이위가 보여주는 진심도, 세월이 흐른 뒤 둘의 첫사랑을 연결시켜주는 오작교도 모두 유덕화가 감당하는 몫이다. 영화와 (내 경우 같은) 현실의 갭은 이 첫사랑 이야기를 더욱 아련하고 쫄깃하게 한다.


소녀의 또다른 첫사랑 '유덕화'


♥ 역시 첫사랑은 깨지는 게 진리


  그 시절, 서로에 대한 감정을 숨긴 채 상대방의 짝사랑을 연결시켜주기에 바빴던 소녀와 소년은 공식처럼 이별하고 어른이 된다. 소년이 미국으로 떠난 뒤에 알게 된 진심과 소녀가 뒤늦게 절감하는 감정은 역시 사랑은 깨져야 지켜지고, 떠나봐야 순수해진다는 역설을 실감하게 한다. 하물며 이들은 가장 순수하고 영롱한 첫사랑이다. 이들이 20년 후 유덕화 콘서트장에서 다시 만난 건, 둘은 반가울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론 김이 빠지는 후일담으로 보인다. 콘서트 제목 '진심으로 사랑해~'는, 중국어로 하면 '진심아 사랑해~'와 중의적으로 쓸 수 있는 표현이라는데 린전신(임진심)을 향한 쉬타이위의 메시지라 해도 너무 영화적이다. (영화니까 당연히 영화적이겠지만) 이 뻔하고 노골적인 외침과 계산적인 이벤트는 좀 거슬린다. 물론 개인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왠지 그 둘은 콘서트가 끝나면 친구로 관계를 새로 정립하거나 다시는 안 만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그러길 바래서가 아니라) 20년 지나 만난 첫사랑이 이루어지면 좀 이상한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더 이상한 건가?)


소년과 소녀


  누군가의 첫사랑은 나의 첫사랑이자 우리 모두의 첫사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첫사랑만큼 (첫사랑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의 공감과 지지를 받는 생의 이벤트가 또 있을까. 대상이 다르고 에피소드는 천차만별이겠지만,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범 지구적인 이 뜨거운 연대는 지금도 어디에선가 무수히 많이 현재 진행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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