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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Oct 08. 2018

미국엔 김비서가 없다!

영화 <SET IT UP 상사에 대처하는 로맨틱한 자세> (2018)

  참, 연애질도 가지가지로 한다! 비서가 하다 하다 이젠 별 짓을 다 하네!


  김비서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상큼함을 내세운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를 보고 하는 소리다. 그 '별 짓'이 로맨틱 코미디의 핵심이고, 과한 설정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용서하며 보는 게 로코지만, 뒷맛은 '김비서' 못지않게 개운치 않다. 한국의 김비서는 젊고 매력적인 상사와 연애하지만, 미국의 비서는 진부하게 상사와 연애질 하지 않는다. 그들은 좀 더 철두철미하고 발칙하다. 상사와 연애하지 말란 법은 없지만, 보스와 눈이 맞았을 때 나올 법한 뻔하고 지루한 에피소드를 미국 20대 비서들은 거부한다. 그들은 자신의 인간다운 삶과 복지를 위해 보스들끼리 연애시키는 당돌한 신공을 발휘한다. 일단 여기까지 보면 김비서보다 한 수 위다.    



까탈스런 보스들에게 시달리는 하퍼와 찰리

  하퍼와 찰리는 잘 나가지만 성질 더러운 상사를 모시는 비서다. 같은 건물에서 다른 상사와 일하는 두 사람은 1초의 개인 시간도 없이 까탈스러운 보스 때문에 시들어간다. 자연히 이성교제는 꿈도 못 꾼다. 괴팍한 상사에게서 해방되고자 이들은 싱글인 보스 둘을 연애시키기로 작당한다. 각자 상사의 일정과 취향, 사생활까지 꿰고 있기에 작당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보스들은 진짜 사랑에 빠졌다(고 착각한다).  


  문제는 보스들이 연애하고 싸우고 지지고 볶을 동안, 비서들은 그동안 하던 일에 더해 이들의 연애 관리까지 덤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애초에 하퍼와 찰리는 싱글인 보스들이 사랑에 빠져 지들끼리 놀면, 자신들도 개인 시간이 생겨 이성을 만날 수 있을 거란 계산이었다. 물론 보스들이 데이트할 동안 잠깐의 여유를 맛보기도 한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들의 업무는 결코 줄지 않았다. 보스들의 핑크 기류는 오래가지 못하고 툭하면 다투고 헤어진다 난리 치며 (원래도 난폭했는데 더 심한) 폭군으로 돌변한다. 자연히 비서들은 서로 긴밀히 연락하며 보스들의 비위를 맞추고 화해시킬 방법을 모색한다. 애초에 보스의 사적인 일정까지 조율하긴 했지만 연애에 따른 잡다한 일, 이를테면 데이트할 식당이나 리조트를 물색해 예약하고 꽃이나 선물 보낼 타이밍을 맞추어 보내고, 심지어 화해 멘트까지 짜내는 것 등 새로운 업무가 추가된다. 내가 보기엔 상사의 연애는 비서의 인간다운 삶이나 복지에 도움되는 게 1도 없다. 오히려 변덕맞은 성질을 받아낼 일이 더 빈번해질 뿐이다. 간혹 연애가 순조로울 땐 상사의 너그러운 면모를 보긴 하지만 매우 드문 일이다. 게다가 보스들이 결혼하겠다고 선언하자, 슬슬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그들이 운명이라고 믿었던 상황이 사실은 다 자신들이 조작한 거라 불안해한다.  


보스들을 연애시키기로 작당한 두 비서


  도대체 이 로맨스는 누굴 위한 연애고 누굴 위한 해방인가. 아니, 비서들이 해방되긴 한 건가. 당장 결혼식만 해도 보스들은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에 호텔, 신혼여행지, 파티 준비까지 모든 걸 비서들에게 일임한다. 자신의 사랑과 감정도 비서 없이 해결 못하는 늙고 괴팍한 상사들을 위해 젊고 혈기왕성한 비서들은 사생활을 희생하고 인간다운 삶을 저당 잡힌다. 성공한 보스에게 찍히지 않고 추천서와 신뢰를 얻어 성공하겠다는 야망 때문이다. 이럴 바엔 차라리 상사와 연애하는 김비서가 영리한 젊은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이 비서들이 아주 손해만 보는 건 아니다. 예상대로 지들끼리 썸을 타며 짬을 내어 즐긴다.


서로에게 다가가는 두 사람


  하퍼와 김비서, 둘 다 결국 원하는 것을 쟁취하며 해피엔딩을 맞는다. 그들이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오글거리고 오버스러워도 우리는 이들과 함께 정해진 해피엔딩을 맛보려 이 모든 걸 감내한다. 그럴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역경을 극복한 예쁘고 잘 생긴 주인공들은 신물 나게 봐도 또 찾게 된다. 대체 말도 안 되는 이런 발칙한 얘기를 발랄하게 만드는 힘은 뭔지, 혀를 끌끌 차면서도 비슷한 얘기에 또 속아주는 (나의) 저의는 뭔지. 그렇게 보면 김비서나 하퍼나, 그냥 열심히 사는 예쁜 여자 주인공일 뿐인데 굳이 구분 지을 필요가 있나 싶다. 하퍼도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상사와 연애했을 테고, 김비서도 미국에서 일했으면 상사를 연애시키려 했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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