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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Oct 06. 2018

곶감은 따고 가지..

영화 <리틀 포레스트> (2018)

  나만의 작은 숲 같은 건 없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난 그렇다. 쓰디쓴 좌절을 맛본 뒤 숨을 작은 집, 배고파 땅을 파면 눈 속의 배추가 노랗게 속살을 드러내는 마당도 없다. 먹다 남은 완숙 토마토를 던지면 열매를 얻을 수 있는 땅도, 봄나물 파스타를 뚝딱 만들어낼 손재주도, 막걸리를 담가먹을 의지도 없다. 가식과 사심 없이 만날 수 있는 어릴 적 소꿉친구는 더더욱 없다. 그래서 이 영화는 내게 판타지다. 시골 내려와 1년을 오롯이 보낸 여주인공 얼굴은 여전히 희고 뽀얗다. 땡볕에 잡초를 뽑고, 산에서 밤을 따고, 텃밭을 일궈도 여전히 곱다. (이 영화가 진짜 판타지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무일푼이지만, 이웃의 농사를 거들어 주고 텃밭을 가꾸기만 해도 먹고사는데 지장 없는 살림살이는 신비스러울 정도다. 60대에도 청년 소릴 듣는 농촌에 20대 파릇한 젊은이들이 셋씩이나 포진해있다니, 이들이 사는 마을은 축복받은 게 틀림없다.  



  임용고시에 떨어진 혜원(김태리)은 숨어들듯 시골집으로 돌아온다. 배가 고파 왔다는 말대로, 오자마자 심상찮은 솜씨로 음식을 뚝딱 해 먹는다. 쌀밥에 배춧국과 배추전. 혜원이 탐스럽게 먹는 모습은, 따라먹고 싶기보단 보기만 해도 배가 든든해 오히려 입맛을 가시게 한다. 훌쩍 떠나버린 엄마의 기억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집에서 혜원은 꼬박 1년을 보낸다. 어릴 적 친구 재하(류준열)와 은숙(진기주)은 무료한 시골 생활의 활력이 된다. 도시의 직장을 때려치우고 낙향해 농사짓는 재하와, 시골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못 벗어난 은숙은 다른 듯 닮은 모습으로 혜원을 맞는다. 딱히 수입이 없어도 자연에서 나오는 먹거리와 친구들만으로 시골 생활은 낭만과 힐링 그 자체다. 혜원의 식생활은 서울에서 편의점 알바를 하며 한 끼 때우던 도시락과는 차원이 다른, 소박하지만 건강한 삼시 세 끼로 구현된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산다면 이보다 더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삶은 없을 것이다. 혜원에게 고향집과 밥과 친구들은, 지친 심신을 달래주고 회복시켜주는 안식처다. 잠깐 있을 거라면서 사계절 꼬박 고향집에 머문 것은 그녀의 근본이 단단히 여물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흔들렸던 뿌리가 단단히 고착되면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길을 떠난다. 혜원은 자괴감 때문에 연락을 거부했던 남자 친구에게 임용고시 합격을 축하한다고 말한다. 심신을 추스른 그녀는 정해진 수순처럼 고향을 떠난다. 올 때처럼 아무 말 없이.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고향은 돌아오긴 좋은 곳이지만, 머무르긴 좀 그런 곳인가 보다. 겨울에 떠난 혜원은 봄이 되어 다시 돌아온다. 이번엔 얼마나 머물지, 또 언제 떠날지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언제든 돌아올 고향집과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좋아 보이지만 이상하게 부럽진 않다. 부러워하기엔 혜원이 지낸 고향에서의 사계절은 너무 이상적이다. 꿈꿀 수 없는 판타지를 보면 오히려 나와는 관계없는 얘기로 치부되는 감정이랄까. 그녀가 뚝딱 해 먹는 음식, 땀 흘린 노동의 결실, 자연의 아름다움, 친구들과의 스스럼없는 우정은 (수고와 갈등에도 불구하고) 그저 꿈같은 판타지로만 느껴진다. 이 영화가 너무 싱그럽고 고와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주인공이 땀 흘리며 밭일을 해도, 왠지 시원하고 재밌어 보인다. 그녀가 짓는 소박한 밥상은 나에겐 도저히 엄두가 안 나는 마술이나 다름없다. 배우고 익히면 그 정도 음식이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왠지 내가 하면 (영화에서 보던) 그 맛, 그 느낌은 아닐 것 같다. 그나마 현실적으로 저건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은 건, 감을 깎아 곶감을 만드는 일이다. 혜원이 말리려 널어놓은 곶감을 놔두고 떠나는 것을 보고 어찌나 안타깝던지. 영화 보는 내내, 탐스러운 비주얼에도 불구하고 (혜원이 만들어 먹는) 음식들은 별로 먹고 싶지 않았는데, 곶감만은 진심 탐났다. 아마 나만의 작은 숲이 생긴다면, 곶감이 사방에 널려있어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그런 시공간일지도 모르겠다.



  원작 일본 영화보다 더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한 화면이 돋보인 이 영화는 과하지 않은 이야기가 담백해 좋았다. 혜원 엄마(문소리)가 뜬금없이 떠나는 게 좀 거슬렸지만, 뭐 그 정도야 감수할 수 있다. 원작처럼 봄 여름과 가을 겨울로 나누지 않은 건 정말 잘 한 것 같다. 솔직히 대사도 별로 없는 일본 영환 지루했다. 나처럼 먹방이나 쿡방에 최적화되지 않은 관객에겐 최소한의 서사가 필요하다. 아니면 곶감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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