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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Oct 16. 2018

찬란하고 쓸쓸한 포르테 디 콰트로 콘서트

<가을밤 콘서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2018.10.15.

  10월의 어느 멋진 밤은 라흐마니노프로 시작됐다. 피아니스트 아비람 라이케르트(Aviram Reichert)와 코리아 쿱 오케스트라의 협연은 짧지 않은 연주에도 느낌이 충만한 시간이었다. 중간에 악장이 바뀔 때 여기서 박수치는 게 맞나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나의 무지보다 객석의 용기(?)를 따랐다.

  인터미션 때 보니, 피아니스트는 제자(로 보이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 옆 자리 관객은 공연 내내 그의 연주를 따라 맨손으로 피아노 치는 제스처를 했다. 전공한 사람인 듯싶다. 어릴 때 배웠지만 피아노와 절연한 나는 악보 보는 법은 예전에 잊었고, 유려한 피아노 선율을 들어도 결코 손이 반응하지 않는다.  


  (좌석 시야 때문에) 연주 내내 피아니스트의 뒷모습만 봤지만 지루하진 않았다. 가끔 연주 중간에 그가 손의 땀을 닦고 툭 던져놓는 하얀 손수건이 인상적이었다. 처음엔 피아노 건반을 닦더니 나중엔 얼굴도 닦으시던데, 피아니스트 못지않게 그의 손수건도 열일하는 것 같다.  


  오케스트라에서 심벌즈 치시는 분에게 종종 눈이 갔다. 협연 초반엔 존재를 드러내지 않지만, 중반 이후엔 잊을만하면 심벌즈 소리가 들린다. 그분은 맨 뒤에 다른 단원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어서 눈에 띄었는데, 심벌즈가 나서야 할 타이밍 몇 초 전에 일어나 잠깐 기다리다 치고 앉는다. 여섯 번인가 일곱 번인가, 그분이 일어섰다 앉길 반복하니 피아노 협주곡이 끝났다. 바이올린이나 비올라 같은 현악기와 달리 타악기는 보통 악기 하나를 한 사람이 맡으니, 실수하면 대번에 드러나서 많이 긴장할 듯싶다. 내가 보기엔 오늘 심벌즈는 제 역할을 완벽하게 한 것 같은데, 미세한 실수를 했는지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다.


  가끔 귀에 익은 멜로디가 흘러나왔고, 어떤 부분은 오케스트라 음향에 피아노 소리가 살짝 묻히는 느낌도 있었지만, 오케스트라와 피아노 협연은 쌀쌀해진 가을밤을 포근하게 해 주었다.




  포르테 디 콰트로는 예의 그 반듯한 자태로 성큼성큼 등장했다. 한 달 만에 보는데, 그 사이 다들 조금 더 '잘생김'을 장착한 듯하다. 같이 간 친구는 포디콰 맏형 고훈정 배우를 보더니 '깎아놓은 밤톨'같다 한다. 어디 그 분만 그럴까. 내 눈엔 네 명 다 '깎아놓은 밤톨'처럼 희고 (얼굴이) 작고 단정하다. 다른 은유나 수식어를 더는 못 찾겠다. 그냥 이번 가을에 포르테 디 콰트로는 나와 내 친구의 마음속에서 '깎아놓은 밤'인 걸로.


포르테 디 콰트로. 이 슈트가 그 슈트인가!


  조금 이상했다. '베틀 노래'와 '신기루'를 듣는데, 눈가가 촉촉해진다. 라이브로 한두 번 듣는 것도 아닌데, 유독 이번 무대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다니. 계절 탓은 아니다. 나는 겨울을 좋아해서 가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랄 뿐, 이 계절에 감상적이 되진 않는다. 요새 슬픈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슬픈 생각을 한 것도 아니고,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릴 만한 사연도 없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그들의 무대가 너무 아름답고 황홀해서인데.. 이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오늘따라 새삼 왜 이럴까 싶었다. 늘 느끼지만, 그들은 저러다 성대에서 피가 나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열창한다. 난 노래 세 곡만 하면 목이 쉬어버리는 저질 성대를 갖고 있어서 심장을 저릿하게 하는 포르테 디 콰트로 노래를 들으면, (그게 그들의 업이라 해도) 경외심이 생긴다.


  눈시울이 더 뜨거워지기 전에 (나에겐 가장 희고 아름다운 밤톨인) 테너 김현수 군을 자세히 봤는데 뭔가 다르다. 그의 재킷만 좀 길다. 무대에 설 때 포디콰는 네 쌍둥이처럼 대체로 같은 슈트를 입는데, 자세히 보면 미세한 차이가 있다. 훈정이 형은 늘 그렇듯 슬림하고 단아한 핏을 살리는 짧은 재킷을 입었다. 태진 군과 벼리 군은 비슷한 길이로 입었는데, 현수 군의 재킷은 길이뿐 아니라 라펠(lapel 코트나 재킷의 접은 옷깃) 부분 재질도 셋과 다르다. 결정적으로 벤트(vent 뒤트임)도 셋은 더블 벤티드인데 혼자 싱글 벤티드다. 명작 콘서트 때도 이 슈트를 입은 것 같은데(아닌가?) 그땐 이렇게 자세히 보지 않았다. 네 남자의 재킷을 관찰하는 사이 내 눈가는 다시 보송해졌다.


  사실 이번 무대는 많이 아쉬웠다. 다른 아티스트와 나누어 가진 무대라 해도 유난히 짧고 에누리가 없었다. 노래도 많이 안 했지만 멘트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리더 고훈정 형은 '여기 오신 모든 분들 축복합니다~'라는 고정 멘트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세종문화회관 직원들 칼퇴근시켜야 하니 예정된 공연 시간보다 1분도 지체해선 안 된다고 당부했는지, 앙코르곡으로 '아다지오'를 열창하고 단호하게 들어갔다. 어차피 헤어질 거 미련 안 남게 일부러 싸늘하게 돌아서는, 속 깊지만 냉정한 구 남친들처럼. 심지어 현수 군과 훈정이 형은 일곱 곡을 부를 동안 물도 한 모금 안 마셨다.


  프로그램을 모르고 온 것도 아니고, 객석이야 두 시간이지만 포디콰는 리허설과 여러 가지 준비로 하루 종일 힘들고 지쳤을 것이다.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최선을 다했고 내 눈시울이 뜨거워질 정도로 아름다운 공연을 선물했지만, 돌아서서 뒤도 안 돌아보고 무대 뒤로 사라지는 모습은 왠지 서늘했다. 그들이 잘못하거나 실수한 건 1도 없다. 설사 그렇다 해도 난 이미 사심을 쏟아부어서 그들을 비판하거나 원망할 힘이 없다. 너무 순식간에 지나간 시간과 무대가, 가을 손님처럼 왔다간 그들의 뒷모습이 그저 찬란하고 쓸쓸할 뿐이다. 아찔할 정도로 차갑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에 뜨겁고 쓴 에스프레소를 끼얹은 아포카토를 원샷한 기분이랄까. 둘 다 무척 좋아하긴 하지만.


  역시 (오늘도 느꼈지만) 그들은 가까이에서 재킷 한 자락까지 자세히 봐도 내겐 잡히지 않는 '신기루'다. 그들은 매번 같은 노래를 하지만 매번 조금씩 다르게 들린다. 콘서트에서만 얻을 수 있는 깜찍한(?) 선물 같은 순간이다.


  아쉬워서 더 아름다운지도 모르겠다. 머지않아 내가 기다리는 겨울이 오면 또 볼 수 있겠지. 찬란하고 쓸쓸한 (도깨비가 아닌) 신기루 같은 그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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