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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Oct 23. 2018

살아있는 사람이 만든 지옥

영화 <행복의 나라> (2018)

  인간은 나약하지만 무서운 존재다. 극도로 약하기 때문에 내면에 잠재된 악까지 끌어내 발악하며 추함을 드러내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종종 살아있는 인간이 귀신보다 섬찟하다. 살인마나 극악무도한 반인륜적 범죄자도 그렇지만, 평범한 사람에게서 언뜻 보이는 추함과 사악함은 더 오싹하다. 나도 인간이지만 대체 인간이 뭔가 싶기도 하다.   



8년 전 자살을 시도했던 민수


  8년 전, 민수는 자살하려 철로에 뛰어들었다 살아나는데 대신 그를 구하려 뛰어든 진우가 죽는다. 그 후 민수는 해마다 진우 제사에 참석한다. 어색하게 민수를 대하는 진우의 가족들은 그렇다 쳐도, 민수의 참석을 종용하며 과한 친절을 베푸는 진우 엄마 희자는 민수뿐 아니라 지켜보는 사람까지 숨 막히게 한다. 아들의 목숨을 희생시킨 사람에게 제사 참석의 의무 정돈 지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희자의 아집은 귀신보다 무섭고 소름 끼친다.   


(민수를 위해 죽은) 진우의 가족


  민수에겐 만삭인 아내가 있다. 결혼 전 일은 말하지 않은 듯, 민수는 아내에게 장례식장에 간다는 거짓말을 하고 진우 제사에 참석한다. 제사가 끝나면 죽음보다 무거운 분위기에서 제삿밥을 넘기는 민수에게 희자는 억지로 더 먹길 강권하고, 죽은 아들 방에서 자고 가길 종용한다. 진우의 방은 그가 살아생전 쓰던 그대로 변함없이 보존되어 있다. 진우의 사진이 걸려 있는 방에서, 그가 쓰던 침대에 누운 민수가 어떤 기분일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굳이 그 방에서 제삿날 자고 가라는 희자의 심사가 무엇일지도. 결혼해 처자식까지 있는 민수에게 자고 가라고 하는 건 너무하다는 진우 누나의 말에도 희자는 고집을 꺾지 않는다. 희자가 정해놓은 일련의 의식은, 그녀의 아들을 죽이고 살아남은 민수에겐 차마 거역할 수 없지만 떨쳐버리고 싶은 저주나 다름없다.


  살고 싶다고, 살려 달라고, (그만 오고 싶은데) 언제까지 와야 하냐고 절규하는 민수에게 희자는 싸늘하게 말한다. "너무 이른 거 아니야? 우리가 죽으면 네가 진우 제사상 차려줘야지."


  대체 이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의식은 누굴 위한 것일까. 희자도 알 것이다. 민수가 마지못해 진우의 제사에 참석한다는 것을. 진우의 누나를 비롯한 다른 식구들도 민수 보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다. 어색하고 불편한 게 당연하다. 이제 그만 잊고 각자 살자는 진우 누나에게 희자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버럭 한다. 그녀는 민수를 아들의 제사상에 빠져선 안 되는 제물이라도 되는 듯 가시 돋힌 속내를 이런 식으로 드러낸다. 자식 잃은 어머니의 한은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할 수 없다. 민수가 다시 죽는다 해도, 죽은 진우가 살아 돌아오지 않는 한 희자의 마음은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이렇게 타인의 삶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건 무모하기 짝이 없다. 그 어떤 행위도 아들 잃은 어머니를 달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수와 진우의 어머니 희자


  (나 때문에) 죽은 사람의 어머니를 위해 1년에 하루 희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하루 때문에 삶이 죽음보다 못하다 하면, 한 목숨을 희생시켜서 연장한 삶이 죽고 싶을 만큼 비참하다면, 아들의 희생을 온전히 의미 있게 하기 위해서라도 놔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아들의 제사상을 바라보는 희자


  사실 민수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은 희자만이 아니다. 희자가 직접적으로 그의 삶을 옥죄고 있는 듯 하지만, 아기를 가졌으니 장례식장에 가지 말라는 아내나, 죽었어야 할 목숨이 살아있다고 말한 점쟁이나 모두 민수의 죄의식을 건드리며 괴롭힌다. 그래도 자기 자신만큼 그를 괴롭히는 사람은 없다. 그는 자살 시도했던 전력과, 그로 인해 희생시킨 타인에 대한 부채감과 절망, 죄의식을 강요하는 사람들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파괴한다. 정말 그는 살아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던 걸까.


  태어난 목숨이 살아가는 데엔 딱히 이유가 있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죽음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 만든 죽음이든 아니든. 산 사람이 맞이하는 타인의 죽음은 그래서 각자 소회가 다르다. 세상에 없는 지옥을 만들어 사는 사람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닐 것이다. 직접 누군가를 해치지 않아도 나 역시 지옥을 만들고, 또 누군가가 만든 지옥에 빠져 허우적댈 수 있다. 살아있는 사람이 만든 지옥은 값진 희생도 빛바래게 할 만큼 깊고 참혹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세상이 만든 지옥의 상상도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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