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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Oct 20. 2018

남자가 꽃보다 아름다우면..

영화 <SUMMER IN FEBRUARY> (2012)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화양연화(花樣年華)'라고 한다. 재능과 미모를 타고 난 여자는 인생의 꽃길을 예약해 놓은 거라 여기기 쉽다. 사실 그런 여자의 생은 무능하고 평범한 사람보다는 다채롭고 아름다울 확률이 높다. 100년 전, 지난 세기에 있었던 일은 그래서 더 안타깝다.     



  영국 귀족 아가씨 플로렌스 카터-우드(에밀리 브라우닝 Emily Browing)는 완고한 아버지를 피해 그림 공부를 하는 남동생이 있는 콘웰의 라모나에 온다. 동생을 따라 예술가들의 모임에 간 그녀는 두 남자를 알게 된다. 오만하지만 천재적인 화가 AJ 머닝스(도미닉 쿠퍼 Dominic Cooper)와 그의 친구 길버트 에반스(댄 스티븐스 Dan Stevens).

  (※ 참고로 댄 스티븐스는 엠마 왓슨과 함께 출연한 '미녀와 야수'에서 몇 번 안 나오는 엄청 잘 생긴 차밍 프린스, 바로 그 남자다.)  


  길버트는 플로렌스에게 첫눈에 반하는데, 머닝스 역시 귀족적인 기품이 흐르는 그녀를 눈여겨본다. 삼각관계의 조짐이 보이지만, 플로렌스는 (어떤 여자라도 거부하기 힘든) 길버트에게 호감을 보인다. 젊고 아름다운 여자와 완벽한 남자가 눈이 맞으면, 약간의 장애(동시에 그녀를 좋아하는 또 다른 남자)가 있어도 이들의 사랑은 큰 문제없이 흘러가게 마련이다. 그렇게 둘이 잘 되는가 싶었는데 변수가 생긴다. 여자가 변심한 것이다. 누가 봐도 남자가 아까울 정도로 자상하고, 매너 좋고, 완벽한 미남인 귀족 길버트를 놔두고 플로렌스는 머닝스에게 한눈을 판다. 회화를 배운다며 화가들 주위를 맴돌던 그녀에게 머닝스는 그림 모델을 제안하며 접근한다. 우아하지만 자기주장이 뚜렷한 플로렌스는 서민 출신인 머닝스의 엉뚱하고 저돌적인 모습에 넘어간다.


플로렌스와 AJ. 머닝스
길버트와 플로렌스


  길버트는 상처받지만 둘의 결혼까지 묵묵히 인내하며 한때 사랑했던 여자에 대한 예의와 친구에 대한 우정을 지킨다. 플로렌스는 머닝스 그림의 모델이 되어준 여자가 자기만이 아니라는 것에 절망하며 경솔했던 자신을 자책한다. 청혼을 받아들였지만 아직 결혼식 전이니 파혼할 수도 있건만, 플로렌스는 이미 식어버린 마음을 안고 체념하듯 머닝스와 결혼한다. 그래 놓고 결혼식 당일 자실 시도를 하는데 길버트 때문에 목숨을 건진다. 억압적이고 거침없는 머닝스는 플로렌스를 점점 불행하게 하고, 그녀는 자신이 무심코 차 버린 행복(길버트와의 미래)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절감한다. 대위인 길버트는 플로렌스에 대한 마음을 접으려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 자원했는데, 불행한 결혼 생활에 지친 플로렌스가 다가오자 하룻밤을 함께 보낸다.


  길버트는 예정대로 아프리카로 떠나고, 그의 아이를 임신한 플로렌스는 남편의 멸시와 증오를 견디다 못해 자살한다. 3년 후,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길버트는 머닝스가 그린 플로렌스 그림을 간직하며, 라모나에 집을 짓고 평생 그 그림을 걸어두었다고 한다.


사랑을 확인하는 두 사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는 인생의 꽃길 한가운데 있는 젊고 재능 있는 여자가, 아름다울 뻔한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가파른 내리막길로 굴러 떨어뜨리는지 보여준다. 누가 봐도 아닌 것 같은 불구덩이에 스스로 뛰어드는 무모함은 젊어서 그렇다 해도 너무 충동적이고 이성적이지 못하다. 잘못된 만남을 되돌릴 시간도, 불행한 결혼을 끝장낼 시간도, 하다못해 불륜을 저질렀지만 부자인 친정 도움을 받아 사생아를 낳고 연인을 기다릴 시간도 그녀에겐 분명 있었다. 세간의 따가운 시선과 모멸감을 견뎌야 하겠지만, 똑똑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여성이 만삭의 몸으로 자살한 것은, 연민과 동정보다는 끝까지 충동적이기만 한 무책임과 무모함에 질리게 한다.

 

  실재했던 이 사랑이 해피엔딩이었다면, 누구나 이 여자의 열정과 무모함을 칭송했을 것이다. 실화라 하지만 몇 년의 세월을 한정된 시간에, 그것도 한쪽의 시선에서만 보는 거라 객관적으로 말할 순 없지만 딱 봐도 여자가 잘못했네, 지 무덤 지가 팠네, 이런 생각밖에 안 든다.    

   

길버트, 플로렌스, 머닝스


   "오늘은 진짜 여름 같아요. 2월의 여름.."

  열정에 사로잡힌 연인들은 세상을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느끼고 싶은 대로 느낀다. 세상에 둘만 있다는 듯, 바닷가에서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며 하는 이 대사는 영화의 타이틀로 쓰였을 만큼 감각적이고 아름답지만, 왠지 공허하게 들린다. 이들의 사랑이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마음에 와 닿지 않고 그냥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실제 존재했던 이들의 관계와 사랑이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영화에서만 보면 길버트가 압도적으로 매력적이라 자살한 플로렌스가 상대적으로 초라하게 보이고, 길버트가 평생 잊지 않을 정도로 가치 있는 여자인가 의심스럽다. 영화 속 캐릭터보다 배우의 이미지가 더 압도적이라 그런 것 같다. 가끔 그런 영화가 있다. 여주보다 남주가 더 아름답고, 영화 속 인물이 아닌 자연인 배우 자체로만 보이는 영화가. 여주인공이 다른 배우였다면 달라졌을까.   


  여주인공의 이미지 때문인지, 임신한 여자의 자살 때문인지, 그냥 한 여자가 계속하는 선택이 못마땅했기 때문인지, 이 영화는 배우들의 나무랄 데 없는 연기와 아름다운 배경에도 불구하고 지루하고 나에겐 그다지 이해하고 싶지 않은 영화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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