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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Nov 09. 2018

군중 속에 고독할 권리

영화 <ANON> 2018

  나는 커피숍에 자주 가는 편이다. 내가 사는 곳에서 반경 1,2킬로 안에 커피숍이 스무 개도 넘개 있다. 처음엔 동네 커피숍에 가지만 결국 번화가 프랜차이즈 커피숍으로 간다. 동네 커피숍 주인이나 직원이 내 얼굴을 익히고 아는 척하면 발길을 끊기 때문이다. 나를 알아보는 작은 커피숍에선 1시간 이상 혼자 앉아있기 불편하다. 회전율이 생명인 커피숍에서 커피 한잔 놓고 눈치 보고 싶지 않다. 단골이라고 더 잘해주는 것도 없고 바라지도 않으니, 나를 수많은 손님들 중 하나로만 대하는 곳이 편하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누구와도 알지 못하고 연결되어 있지 않은 나는 익명의 존재다. 나를 떠벌리거나 알리지 않을 권리를 행사하며 공간을 차지하고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 익숙하고 편하다.      



  근 미래 미국이 배경인 영화 <Anon>에는 무엇이든 실시간으로 기록하는 가상 인공지능 시스템 '에테르'가 나온다. 이 시스템은 인간이 보고 들으며 받아들인 정보를 컴퓨터에 기록한다. 모든 시민의 신체에 이 시스템을 이용 가능한 칩(같은 것)이 이식되어서 그 누구도 (엄격한 의미의) 익명으로 존재할 수 없다.


어떤 정보나 기록도 없이 error로 존재하는 익명의 여인


  거리를 걸으며 사람과 사물을 눈으로 인지하는 순간, 개체에 내재된 정보가 텍스트로 뜬다. 사람은 성별, 나이, 인종, 직업 등. 상품은 성분, 원산지, 생산 날짜, 가격 등. 사람들은 안구를 통해 정보를 주고받는다. 다른 이의 경험이 기록된 정보 파일을 전달받고 싶으면, 상대의 눈을 응시하면 된다. 그러면 상대 시선으로 저장된 (과거 기억) 동영상이 내가 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재생된다. 이렇게 완벽하게 정보화되고 개방된 사회에선 범죄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범죄를 수사하는 1급 형사다.    


  형사 살 프라이랜드(클라이브 오웬 Clive Owen)는 피해자의 시선으로 저장된 동영상 파일에서 범죄자의 정체를 알 수 있는 부분만 지워져 있는 연쇄 살인사건을 조사한다. 에테르를 해킹한 솜씨 좋은 해커가 피해자의 기억을 지웠다고 판단한 수사팀은 기억을 삭제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해커를 수배한다. 그리고 기억을 삭제하며 돈을 받는 '아논'을 용의자로 추정, 함정 수사를 한다.


해커를 쫓는 1급 형사 살 프라이랜드


  아논은 말 그대로 이름도 그 어떤 정보도 없는, 에테르 체제 사회에선 '에러 error'라고 밖에 설명이 안 되는 존재다. 그녀(아만다 사이프리드 Amada Seyfried)는 젊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묘령의 여자다. 살은 일부러 기록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만들어 아논에게 접근해 삭제를 부탁한다. 그녀가 살의 기록에 접근해 기억 동영상을 조작하는 솜씨는 예술이다. 자신과 접촉한 살의 기억 기록까지 깔끔하게 처리하는 그녀는 에테르를 거부한 채, 20세기 아날로그 방식으로 생활한다. 살은 아논을 알아갈수록 정말 그녀가 연쇄 살인범일까 의구심이 생기는데, 역시 범인은 살의 아주 가까운 곳에 깜찍한 반전을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다.

  또한 살이 아논을 유인한 게 아니라, 아논이 자신의 해킹을 방해하는 누군가에게 접근하기 위해 살을 역이용했다는 것이 밝혀진다.  


아논의 정체를 의심하면서도 빠져드는 살


  이 영화 속 시민들을 지배하는 에테르는 사람들이 투명하게 서로의 기억을 공유할 수 있고, 그 누구도 완벽한 비밀을 가질 수 없게 하는 시스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는 사라지지 않고, 에테르를 거부하거나 역이용하는 해커들의 솜씨는 날로 업그레이드된다. "모든 게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게 취약해!"라는 대사는 끔찍하게 투명한 사회를 왜 불신할 수밖에 없는지 드러낸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라는 말은 이럴 때 쓰기 적절하다.     

  아논같은 해커가 조작한 정보는, 공적인 기록물도 신뢰할 수 없게 만든다. 완벽한 시스템은 더 완벽하고 까칠한 반항아를 만들어낸다. 반대로 기록을 조작해도 인간의 기억은 지우지 못한다.

 
  아논은 살에게 삶의 기록을 철저하게 숨기고 지우는 매카니즘에 대해 설명하며, 자신의 인생을 복원하려면 알고리즘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만일 돌아보고 싶다면.

  "당신들은 일상적으로 내 사생활을 침해하지만 내가 그걸 찾으려 하면 범죄예요."

  살은 숨으려 할수록 주목받을 뿐이라며, 정체를 숨기는 게 왜 그렇게 중요하냐고 아논에게 묻는다. 무슨 비밀이 있기에 그렇게 기를 쓰고 지우고 숨는 거냐고.

  "꼭 비밀이 있어야 하나요? 뭔가를 숨기려는 게 아니라 보여주고 싶은 게 없는 거예요."
  우문현답이다.


비밀이 없지만 보여주고 싶은 것도 없는 '아논'


  솔직히 가상현실을 그린 이 영화를 완벽히 이해했다고 볼 순 없지만 아논의 심정은 거의 완벽하게 이해한다. 내 인생을 안 보여줄 권리, 익명으로 남을 권리, 숨을 권리가 없는 투명한 사회는 결코 아름답지도 깨끗하지도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누구도 나를 알지 못해서 편안하고 자유롭다면, 군중 속에서 고독을 즐길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그게 다소 냉소적이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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