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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Nov 03. 2018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것은-청설

영화 <청설> (2009, 2018 재개봉)

* 브런치 무비 패스 시사회에서 본 영화입니다.


  내가 매일 아침 깨어나 살아가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은 파동과 흐름에 지배된다. 소통이라는 흐름. 요 몇 년간 우리가 겪은 소통의 부재는 삶을 무너뜨리고 일상의 균열을 만들었다. 개개인에서부터, 세대를 구분 짓는 그들과 우리, 나라의 저 높은 분들과 나의 까마득한 간극까지. 통하지 않으면 어디선가 정체되고 곪는다. 결국 괴사 되어 단절을 초래한다. 중간에서 매스미디어나 SNS가 분주하게 각계와 개인들의 시각과 의견을 물어 나르고 주입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사적이고 조잡한 정보에 상처 받을 때가 많다. 또한 객관적 의견이라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일방통행이 되고, 소통은 요원하다.     



티엔커와 양양의 첫만남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는 한때 TV만 틀면 나왔던 익숙한 광고 카피다. 아름다운 의미를 내포한 이 문장이, 실상에선 소통의 요원함을 우회하는 변명이자 불통을 조장하는 착각일 때가 많다.

  예전에 본 일본 드라마 <너의 손이 속삭일 때>는 청각장애인 여자와 비장애인 남자의 사랑 이야기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막연하게 생각했던 청각장애인의 고충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저 좀 불편하고 편견만 견디면 되겠거니 했던 청각장애인의 삶은 생각보다 위험하고 분주하다. 소리를 모르는 그들의 삶이 고요할 거라는 건 비장애인들의 오만한 착각이다. 그들은 청각 대신 다른 감각을 키우며 일상을 예민하게 산다. 또한 수화가 빚어내는 소리는 고요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입으로 낼 수 없는 소리를 손으로, 더 격한 몸짓으로 만들어 공기에 파장을 일으킨다.


수화로 대화하는 두 사람


  영화 <청설>은 서로 청각장애인이라 착각한 두 남녀의 오해가 빚어낸 아름다운 소통을 보여준다. 청각장애 수영 선수인 언니를 위해 삶의 무게를 견디는 양양(진의함)은 여리지만 의연하고 강하다. 부모님이 하는 식당에서 배달일을 하는 티엔커(펑위옌)는 양양에게 첫눈에 반해 수화를 하며 그녀와 만남을 이어간다. 다른 연인들처럼 사소한 오해와 실수가 반복되지만, 둘의 사랑이 더 애틋한 건 이들이 입이 아닌 손으로 소통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에피소드를 비장애인 연인이 했으면 느낌이 많이 달랐을 것이다. 말을 할 수 없다는 건 그냥 좀 불편한 문제가 아니라, 이 연인들을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만들진 않더라도 나름 심각한 사랑의 장애로 작용한다. 이 아기자기한 사랑 이야기가 빛나는 이유이자 식상하게는 요소가 바로 이 지점이다.    


양양을 위해 수화를 연습하는 티엔커


  양양은 청각장애인 언니와 살며 일상에서도 수화를 한다. 티엔커는 예전에 배운 수화 덕분에 청각장애인 손님 앞에서 수화를 사용한다. 두 사람이 서로를 청각장애인이라 여길만한 정황은 자연스럽다. 한 번도 말을 하지 않는 두 사람은 당연히 둘만 있어도 수화를 사용한다. 이 아름다운 오해는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 그런데 이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에 비해 관계를 진척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이 오해 때문이다. 양양은 티엔커가 청각장애인이라서 망설인다. 티엔커는 (너무 앞서 나가는 면이 있지만) 부모님이 청각장애인 며느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고민한다. 현실적으로 두 사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좀 그렇다.


청각장애인 언니를 위해 헌신적으로 사는 양양


  청각장애인 언니와 평생 살며 수화를 능숙하게 하는 양양이, 또 다른 청각장애인을 미래의 가족으로 상상하길 주저하는 건 솔직히 이해가 안 간다. 상대의 직업이나 재산 때문에 주저하는 것도 별로지만, 장애 때문에 밀어내는 것도 납득되지 않는다. 언니와 더불어 (미래의) 남편까지 청각장애인이면, 그녀의 삶이 지금보다 더 고달프고 피폐해지는 건가. 아니, 청각장애인 가족이 있어서 지금 그녀가 고생하며 사는 건가. 양양이 힘들게 사는 건 사실이지만, 그게 꼭 청각장애인 가족 때문이라고 하기엔 어페가 있다. 그녀는 장애인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가족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희생하는 것이다. (물론 이 희생은 값지고 훌륭하다) 어쨌든 상대의 청각장애가 사랑하는 감정을 애써 부인할 만큼 크나큰 금기이고 넘을 수 없는 장벽인지 의문이다. 언니가 청각장애인이 아니고, 양양이 평생 수화를 쓸 일 없이 살았다면 이해할 수 있다. 장애인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보지 않았으니 두렵고 망설이는 게 당연하다. 누구보다 청각장애인을 잘 알고 이해하는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가 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주저하는 건 납득하기 힘들다. 어쩌면 청각장애인의 삶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나중에 살짝 들긴 했다.  


양양의 청각장애인 언니


  티엔커가 말 못 하는 양양을 부모님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하는 건 이해되지만, 부모님께 교제를 허락받아야 한다는 발상은 몹시 거슬린다. 아들이 청각장애인 여자를 사귀는 게 싫으니 헤어지라고 한다면, 부모님 말을 들을  건가. 왜 다 큰 성인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고 말고를 부모님께 허락받아야 하는지, 자식에게 집착이 강한 아시아 가정의 보편적 행태라 쳐도 이런 관행이 불편하고 거슬린다.


티엔커의 (귀여우신) 부모님


  다행히 티엔커 부모님은 아들의 사랑을 지지하고 응원한다. 열린 사고를 지닌 아시아계 부모다. 만일 아들이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청각장애인 여자와 결혼할 거라 선포했다면 얘기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변함없는 해피엔딩이라면 티엔커의 부모님은 정말 괜찮으신 분들임에 틀림없다. 말하지 않아도 아들의 심정에 공감하고, 아들이 좋아하는 여자의 심성까지 간파한 티엔커 부모님은 진정한 소통의 달인들이다.

  또한 듣지 못하는 줄 알고 티엔커가 수영장에서 양양의 등을 보며 고백한 진심은, 양양이 진짜 청각 장애인이었다 해도 충분히 전달됐으리라 생각한다. 이 장면은 듣지 못한다는 오해가 만든 아름다운 매직 같은 순간이다.

  

거리공연 아르바이트하는 양양을 찾아간 티엔커


사랑하는 두 사람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건, 아주 가깝고 내밀한 사이에서나 가능한 소통이다. 우리는 누군가와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 가까운 사이도 멀어질 수 있고, 밖으로 내뱉은 말도 다 진심은 아니다. 말이 아닌 눈빛이나 제스처, 혹은 공기의 파동이 빚어내는 미세한 뉘앙스가 때론 많은 걸 알려준다. 비교적 진심에 가까운.


  청각장애인이 말을 못 한다는 건 명백한 거짓이다. 그들은 입이 아닌 손으로 말한다. 그들도 (손으로) 말을 거부할 수 있지만, 대신 눈빛과 제스처와 뉘앙스가 진심을 대변한다. 입이 닫히고 손이 멈춰도, 말로 못하는 진심을 전달할 수 있다. 다만, 상대의 수신 여부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착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꼭 말로 해야 아냐'라는 만용은, 말 하나 제대로 못하는 소통 장애자들이 주로 쓰는 말이다. 그런 핑계를 댈 시간에 진짜 용건을 말하는 게 낫다. 진심을 전달할 다른 소통 체계를 모른다면, 말이라도 똑바로 해야 한다. 연인을 위해 수화를 배우고 외계어 못지 않은 외국어를 익히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거란 오만을 부리지 않는 사람들만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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