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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Nov 15. 2018

그렇게 어른이 된다 -영주

영화 <영주> 2018년

*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에서 본 영화입니다.


  세상은 흑백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곳이다. 내가 어른이 됐다고 느끼는 무수한 순간들 중엔 이런 생각을 할 때도 포함된다. 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편과 나쁜 편을 가르는 본성이 튀어나와 당혹스럽기도 한다. 나 또한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닌, 무심하게 회색지대에 머물 때가 많으면서 어쩌자고 내 멋대로 세상을 편 가르기 하는지 모르겠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책처럼 선과 악이 명쾌하다면 세상이 아름다웠을까. 살기 좀 더 수월했을까.  



부모님 제사상을 차리는 영주


  아직 스무 살이 안 된 영주(김향기)에게 세상은 스산한 곳이다. 열네 살, 한창 부모의 사랑과 손길이 필요할 나이에 영주의 부모는 영주와 어린 동생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교통사고 사다. 이른 죽음을 맞이하거나 고통스러운 병마에 시달리는 건 전생에 무슨 죄를 져서도 아니고, 벌을 받아서도 아니다. 이유가 없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그런 운명이고 팔자였을 뿐이다. 영주가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더 어린 동생을 책임지며 핍진하게 사는 것도 그녀의 운명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왜 하필 나에게, 왜 하필 우리 부모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영주가 세상을 원망하고 인생이 꼬였다 비관해도 할 말이 없다. 원래 사는 게 그런 거란다,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당사자밖에 알 수 없는 스산한 바람이 무슨 말로 막아지고 위로가 될까.


  영주는 사고친 동생 때문에 합의금 300만 원이 필요해 고모를 찾아가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한다. 이미 그전에 대출사기까지 당했다. 어쩜 이럴 수 있을까 싶은데, 물정 모르는 어린 소녀가 이런 일 당하는 건 뉴스거리도 안 되는 세상이다. 남도 아니고 피붙이인 고모마저 어린 조카에게 너무한다 싶지만, 영주 남매가 고아가 된 후 4년 동안 시설에 가지 않고 살던 집에서 온전히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고모 부부가 최소한의 보호자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 짐작된다. 그렇다고 해서 고모의 행동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살기 팍팍한 그들 입장에서 보면, 언제까지 조카들 뒷감당을 해야 하나 심란할 법도 하지만 야박한 그녀의 행동은 같은 어른으로서 부끄럽고 원망스럽다.


영주 부모님 교통사고의 가해자 상문


  절박한 영주는 교통사고로 부모를 죽인 가해자를 찾아간다. 그리고 뜻밖에 그들에게서 세상의 온기를 느낀다. 사람을 죽인 사고로 괴로워하는 상문(유재명)과 영주가 돈을 훔친 걸 알면서도 더 내어주는 상문의 아내 향숙(김호정)은 영주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또 하나의 세상이 된다. 그들은 평생 침대에 누워 지내야 하는 아들을 돌보는 것도 사람 죽인 죗값이라 여기며 순응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온정을 느끼며 영주는 혼란스러워한다. 너무 힘들고 외로워 정에 이끌린 거라 해도, 그들은 참으로 따뜻하고 성실한 어른들이다. 영주의 부모만 죽이지 않았다면.


영주를 딸처럼 대하는 향숙


  영주가 엄마 옷을 벗어던지고 향숙이 사준 (나이에 맞는) 옷을 입는 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보인다. 그들은 영주의 원수가 아니지만 은인이라고 하기에도 좀 어폐가 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그냥 어른이다. 힘들고 절박한 아이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병든 자식을 원망 없이 돌보는, 과거 사고에 대한 죄책감을 놓지 않고 괴로워하는, 좀 괜찮은 어른들이다. 그들이 악독하거나 평범해서 영주의 미움과 복수심에 변화가 없었다면, 아이는 가슴 한편에 얼음이 박힌 채 어른이 되는 걸 좀 더 유예했을지도 모른다. 영주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들은 손을 내밀어 영주를 어른의 세계로, 스산한 바람과 희망의 열기가 혼재하는 세상으로 이끌어준다.


영주 동생과 영주, 그리고 상문


  영주가 그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밝힌 후 흘리는 눈물은 어른이 되는 통과의례 중 하나였으리라 짐작해본다. 어른이 되기 싫어도 인간은 어른이 될 수밖에 없다. 영주는 이제 알 것이다. 때로는 혈육보다 남이, 그것도 부모를 죽인 남이 더 절절하게 따뜻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결코 원수도 아니고 복수의 대상은 더군다나 아니라는 것을.


상문과 영주


  아마 영주는 사는 내내 종종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들이 의지가 되고 따뜻할수록 기대고 좋아하면 안 될 것 같고, 죄책감 비슷한 감정도 느낄 것이다. 세상에 없는 부모가 더 자주 원망스러울 것이고, 누군가에게 투사할 미움을 엉뚱한 곳에 풀어놓을 수도 있다. 세상은 선과 악으로 명쾌하게 나누어지지 않으며, 사는 게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몸과 마음으로 부딪히며 알아갈 것이다. 그런 힘든 시간을 견뎌낸 아이는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더 빨리 더 크게 자랄 것이다. 너무 빨리 어른이 되는 아이들은 안쓰럽다. 그래도 언젠가 우리 모두 어른이 된다. 어른답지 못한 어른이 되기도 하지만, 세상이 주는 시련만큼, 그걸 극복한 만큼 괜찮은 어른이 된다면 영주는 꽤 괜찮은 어른이 될 듯싶다. 남들은 영영 모르거나 혹은 한참 후에나 깨닫게 되는 세상의 비밀을 좀 일찍 알게 된 아이는,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이 비밀을 전할 것이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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