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이스 Nov 29. 2018

게스트 하우스엔 게스트만 오는 게 아니다!

영화 <늦여름> 2018년

  게스트 하우스의 가장 큰 기능은 '게스트 하우스의 로망'을 깨는 게 아닌가 싶다. 의외로 게스트 하우스에서 기대하는 썸씽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행지에선 많은 일이 생기지만, 게스트 하우스로 좁혀보면 그 '많은 일' 중 얼마를 차지할지 의문이다. 물론 나의 미흡한 경험에 바탕을 둔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다.  


  몇 년 전 제주도 게스트 하우스에서 머물던 나날은 나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추억이 새록새록 돋지도 않는다. 어차피 한겨울이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집 아닌 곳에서 집처럼 최대한 맹숭맹숭 지내다 온 것으로 만족한다.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는 부부,  정봉과 성혜


  정봉(임원희)과 성혜(신소율)는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제주도에서 게스트 하우스를 하는 부부다. 두 달째 머무는 장기 투숙객 밖에 없어 한산한 그곳에 젊은 남녀 손님들이 온다. 여름이 지나간 뒤, 찬바람이 불기 직전에 들이닥친 그들은 알고 보니 그냥 손님이 아니다.


  인구(전석호)는 성혜의 옛 연인이다. 모르고 온 터라, 몇 년 전 갑자기 연락 두절되어 헤어진 애인이 눈앞에 나타나자 당황해한다. 황당하긴 성혜도 마찬가지다. 여자 친구와 함께 온 채윤(정연주)은 은행원으로 정봉의 직장 동료였다. 그녀 역시 정봉과 마주치는 순간 몹시 놀란다. 예상대로 네 남녀는 과거 인연을 의식하며 복잡한 속내를 드러낸다. 채윤과 동행한 하서만 여행지에서의 낭만을 기대하며 젊은 남자를 물색하기에 여념 없다.


성혜와 인구


  성혜는 이제 와 과거지사를 따지는 인구 때문에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다. 남편 눈을 피해 가며, 그때 왜 그렇게 말도 없이 사라졌냐고 추궁하는 인구를 상대하느라 미칠 것 같다. 그 와중에 손님 채윤과 남편이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낌새를 채고 신경이 곤두선다.

  예전 직장에서 좋아했던 채윤을 다시 만난 정봉은 심사가 복잡하다. 옛 인연에 흔들리다긴 보단, 그녀로 인해 되살아난 자신의 과거를 새삼스럽게 반추한다. 채윤의 잘못을 감싸려다 퇴사까지 한 정봉은 아직도 채윤이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하고 있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는 성혜는 애써 씁쓸함을 감추는데 마음이 편치 않다. 이 남자의 순정은 사라진 걸까 유예된 걸까.


채윤과 정봉


  게스트 하우스 주인 부부의 과거 연인이 마치 짠 듯이 같은 날 찾아오는 우연은 좀 뜨악하지만, 그들이 주고받는 눈빛과 신경전, 허탈한 웃음은 인생에서 한창 뜨거웠던 나날을 보낸 남녀의 후일담을 별다른 꾸밈없이 보여준다. 솔직히 이들의 실랑이는 긴장감과는 거리가 멀다. 부부가 서로의 눈을 피해 옛 연인과 썸씽을 만들 기류는 보이지 않는다. 이왕 맞닥뜨린 과거지사를 무리 없이 흘려보내려는 요즘 남녀의 리얼한 정황이 보일 뿐이다. 과거 이별에 대한 의문을 미처 풀지 못한 인구도 어느 순간 구질구질한 질문을 놓아버린다.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옛 여자 친구를 보고 있으니 딱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지만, 미련 때문에 괴롭진 않다.


  성혜는 남편의 과거를 굳이 파고들지 않는다. 인도에서 만나 한국에서 재회한 정봉과의 인연을 운명이라 애써 포장했는데, 그의 과거가 자신들의 운명을 이기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남편의 과거를 지켜보는 아내 성혜


  제주도 게스트 하우스에서 재회한 과거 연인들은 잠시 당황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찾는다. 누군가의 여행지는 또 다른 이들에겐 일상을 일구는 삶의 터전이다. 제주도는 여유와 낭만이 가득한 섬이지만, 뭍사람들에겐 은연중에 시골이라 무시하게 되는 곳이고 잠시 머물다 떠날 휴가지일 뿐이다. 그곳엔 이국적 풍경과 더불어 끈질긴 상술이 만연해있고, 관광지는 막상 가보면 허탈할 정도로 시시하다. 보기에 아름다운 바다는 그 속에 들어가면 개고생 하기 딱 좋다. 그래도 손님들은 동네 주민만 안다는 식당에서 기꺼이 바가지를 쓰고, 등 떠밀려 스킨스쿠버를 한다. 하기 싫어도 마지못해 하고 가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가다 보면, 휴가는 끝나고 고생의 나날은 낭만적 추억으로 탈바꿈한다. 불발된 과거의 연애 또한 낭만까진 아니더라도 아련한 기억으로 남길 여지는 충분하다.


과거를 복잡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두 여자


  거절 못해 억지로 한 스킨스쿠버가 의외로 신날 수 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우도로 가는 배에서 새로운 인연이 생기기도 한다. 변태인 줄 알았던 장기 투숙객이 유명한 사진작가이듯, 여행지에선 예상과 기대가 전복되는 경험을 비교적 쉽게 할 수 있다. 게스트 하우스는 게스트뿐 아니라 주인에게도 일상의 반전을 선물한다. 손님들은 몸만 달랑 오는 게 아니라 수많은 사연과 비밀을 품고 와 펼쳐놓고, 또 다른 기억과 추억을 만들어 챙겨가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건, 아마 내가 아무것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추억은 힘이 없을지 몰라도, 간직하고 싶을 만큼 아름답긴 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무도 바라지 않는 기적, 환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