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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May 09. 2018

무자비한 교양의 서늘한 민낯

영화 <Effie Gray>  (2014)


 우리 주위에 있는 악마의 민낯 


그런 사람이 있다. 숨은 쉬는데 사람 같지 않고, 겉으로 보기엔 악하진 않지만 서늘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사람.  5학년 때 담임이 그런 인간이었다. 짧은 곱슬머리에 미간엔 항상 신경질적인 주름이 잡혀있던 그녀는 큰 수술을 했다는 소문과 함께 항상 약봉지를 들고 다녔다. 우리와 같은 학년인 쌍둥이 자녀가 있는 엄마였다. 나는 그녀에게 학대받았다. 회초리로 때리는 공식적인 체벌(그때는 그 정도 체벌은 다반사였다)을 제외하고는 딱히 신체적인 학대를 당하진 않았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악마로 기억하는 이유는, 5학년 내내 조용하면서도 은밀하게 나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걸스카웃 활동을 했는데, 엄마가 학교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엄마가 돈 봉투를 들고 인사하러 오지 않아서다.


"엄마 바쁘시니? 바빠도 선생님 좀 보고 가라고 전해라."


실과 시간에 바느질하는 걸 가르쳐주면서 그녀는 나에게 대놓고 말했고, 나는 엄마에게 그대로 전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많아 바쁜 엄마는 첫째도 아니고 아들도 아닌 나의 말을 흘려 들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내가 한 번 떠들었다는 이유로 몇 개월 동안 반에서 제일 더러운 남자아이와 맨 뒷자리에 앉혔다. 그때 우리 반은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짝을 지어 앉았는데, 나만 그 남자아이와 몇 개월을 앉아야 했다. 그 여자는 선심 쓰듯 점심시간에만 나 혼자 자리를 이동해 여자애들과 도시락을 먹게 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짝은 바꿔주지 않았다. 그 남자애가 더러워서가 아니라, 나 혼자 남자 짝이었다는 것에 죽고 싶었다. 오죽했으면 떠든 사람 이름을 적어낸 여자 부반장이, 00이는 그렇게 많이 떠들지 않았으니 여자 짝으로 바꿔달라고 말했는데도 모른 척했다. 교사가 주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체육 점수는 항상 '양' 아니면 '미'였다. 우리 반은 학급비를 자율적으로 내도록 했다. 말이 자율이지, 교실 뒤에 막대그래프까지 그려서 붙여놓고 돈 안내는 애들을 혼내던 그 여자는 내가 반에서 두 번째로 학급비를 많이 내도 선처하지 않았다. 나의 코 묻은 돈보다 엄마가 들고 와 바치는 돈 봉투가 목적이었으니, 그깟 돈이 간에 기별도 안 갔을 게 뻔하다. 그 여자는 내게 모질고 치사하게, 그러면서도 조용하고 은밀하게 악마 짓을 했다.  


존 러스킨과 그의 비정상적인 부모님


존 러스킨은 영국의 저술가이자 사회비평가다. 건축과 장식예술 분야에서 고딕 복고 운동을 전개했으며,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대중의 예술 기호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부잣집 자제인 그는 명석하고 지적이며 천재적인 면모를 갖췄다. 사회에서도 인정받는 엘리트다. 신 앞에 사랑을 맹세한 아내를 손 끝 하나 건들지 않는다는 것만 빼면 일등 신랑감이다.  


"붓을 움직일 때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야 합니다. 본질만을 나타내야 합니다. 인위적인 차별 없이 존중을 표하면 신의 진실이 드러날 겁니다"


그에게 인위적인 차별 없는 존중은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고, 신의 진실이란 또 무엇일까. 그는 신이 만들었다는 자연과 인간 세상을 경외하며 해석하는데 탁월해도, 신의 아름다운 피조물인 아내에겐 참으로 냉담한 남자다.  

어린 아내 에피는 첫날밤에 자신을 보는 남편의 경멸 어린 시선에 절망한다. 부부가 마땅히 해야 할 행위에 등을 돌린 남편을 어찌해야 할지 망연자실해한다.

"존, 우리가 아이들을 못 가질 만큼 가난한가요? 난 어리지 않아요. 결혼한 여인이라고요" 

교양 있는 남편이 당황하지 않게 돌려서 말하는 아내는, 그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깨닫는다. 성인이 된 아들을 아이 다루듯 감싸는 올가미 같은 시어머니, 지적인 아들에게 사준 예쁜 장난감처럼 며느리를 대하는 시아버지. 에피의 절망이 깊어질수록 그녀의 탐스런 머리카락도 뭉텅이로 빠진다.


존은 예술과 문화 비평을 강의하고 책을 쓴다. 예술의 목적은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고 신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설파한다. 그의 저 높은 교양과 지식은 강력한 무기가 되어 그녀를 옥죄어 온다. 저런 훌륭하고 명망 있는 남편에게 불만을 품고 욕보이는 아내는 방종하고 부덕한 여자가 될 수밖에 없다.

지금 같으면 너무 당연한 질문이지만, 전국의 이혼 건수가 서너 건 밖에 안 되었던 빅토리아 여왕 시대엔 제 기능을 못하는 부실한(?) 남자에게 대놓고 묻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럴 거면 왜 결혼한 거냐?"


아름답지만 불행한 아내 에피 그레이


에피의 남편 존 러스킨의 문제는 단지 기능의 부재, 구실의 무용성에만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신의 뜻을 설파하면서도, 신을 존중하는 방법인 사랑과 배려를 알지 못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는 지식과 배려 없는 교양은 그래서 더 서늘하고 무섭다. 그런 교양은 무지만도 못하다. 만일 그가 많이 못 배운 노동자로 인간적인 본능에 충실했다면, 많은 사람이 그의 지적 영향을 못 받을 망정 한 사람은 행복했을 것이다. 적어도 그의 아내는 여자로서의 삶에 충실했을 것이다. 혹시 기능에 문제가 있더라도 미안해하거나 아내를 애처롭게 여겼을 것이다.


그의 높은 교양과 지식은 자신의 불구를 인정하지 못한다. 그는 부부생활을 원하다 시들어가는 아내를 부도덕한 여자로 몰고 학대한다. 지식인답게 예의 바르고 깔끔하게, 은밀한 경멸로 잘근잘근 괴롭힌다. 남편의 사랑과 자녀를 원하는 아내에겐 그는 악마나 다름없다. 에피 그레이는 어린 시절의 나와 달리, 악마의 민낯을 본 후 참지 않고 떨쳐 일어난다. 자신이 아직도 처녀라는 걸 입증하고 사회적 스캔들을 감수하며 혼인무효 소송을 한다. 그리고 남편의 친구이자 제자인 왕립 미술원 회원 존 에버릿 밀레이와 재혼한다.


에피 그레이와 존 에버렛 밀레이


존 러스킨과 에피 그레이, 에버렛 밀레이는 실존인물이다. 실제로 존은 우정과 자신의 명망을 생각해  에버렛과 에피의 재혼만은 막으려 했지만, 그들은 보란 듯이 결혼해 여러 명의 아이들을 낳고 해로했다고 한다. 우정과 명망은 배려와 존중을 해준 사람에게서만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똑똑한 러스킨이 잊은 모양이다.

실제 밀레이는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남의 아내를 훔친 화가라는 이유로 빅토리아 여왕의 초상화를 그릴 수 없었다고 한다. 나중에 여왕은 밀레이를 예술가로 인정했지만, 그의 아내 에피 그레이는 연회에 못 오게 하는 등 가혹하게 대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문제적 남편, 존 러스킨은 이혼당한 후 어떻게 살았을까. 그의 지적 성취는 그 후로도 매우 탁월했고 많은 저술을 남겼지만 끝내 정신 이상으로 칩거하다 숨졌다고 한다.


국립 왕립미술원장 부인과 에피 그레이


이 영화는 엠마 톰슨이라는 지적인 여배우가 각본을 썼다. 그녀는 존 러스킨으로 실제 자신의 남편을 출연시켰다. 영화에서 에피가 제기한 혼인 무효 소송장을 받는 존의 얼굴이 압권이다. 도대체 아내가 자신에게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순진(?)한 얼굴로 '성적 불구'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그 표정,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다. 그가 탁월한 배우여서 그런 것이겠지만, 그 역을 특별히 남편에게 준 엠마 톰슨에게 무슨 저의가 있는 게 아닌지 잠깐 의심스럽기도 했다.


지식과 교양으로 무장한 무자비한 악마는 예나 지금이나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나 또한 누군가에겐 그런 악마의 형상으로 존재할지도 모른다. 몰랐다고, 내 의도는 아니었다는 말은 지적인 악마들의 가장 흔한 변명이다. 그런 변명이나마 하는 건 그래도 낫다. 이런 나를 이해 못하는 너희의 무지와 열등감을 돌아보라고 뻔뻔한 민낯을 들이대는 것들은 낫으로 찍어도 시원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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