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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Dec 17. 2018

걱정하지 말라는 말처럼 걱정스러운 것도 없다!

영화 <잘 있으니까 걱정 말아요> 2006년

  나에게도 여신 같은 여배우가 있다. 프랑스 배우지만 미국 영화에서도 보기 어렵지 않은 멜라니 로랑(Melanie Laurent). 예전엔 니콜 키드맨을 좋아했고, 그다음엔 레이첼 맥아담스로 넘어가더니 이젠 그녀다. 앞의 두 배우도 여전히 좋아하지만, 지금은 멜라니 로랑이 가장 좋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는 힘닿는 데까지 무조건 찾아본다. 영화 내용이 다소 실망스럽더라도 그녀를 본 것만으로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다.  



아름다운 그녀, 멜라니 로랑


  프랑스 영화 <잘 있으니까 걱정 말아요 JE VAIS BIEN, NE T'EN FAIS PAS>는 뭔가 애매한 영화다. 딱히 충격적이진 않지만 잔잔하다고 할 수도 없다. 일단 설정은 좀 엽기적이지만 풀어가는 방식은 정적이다. 나름 반전이 있지만, 일부러 그런 것처럼 반전을 반전답지 않게 보이기 위해 애쓴 것처럼 맹숭맹숭하다.


부모님과 함께 있는 릴리


  고등학생 릴리(멜라니 로랑 Melanie Laurent)는 여름방학 동안 친구들과 스페인에서 지내다 파리로 돌아온다. 쌍둥이 남동생 로이가 안보이자 의아해하며 부모님께 묻는다. 뭔가 석연치 않은 태도로 로이가 집을 나갔다고만 하는 엄마와 아빠. 릴리는 사이가 돈독했던 동생이 자신에게 말 한마디 없이 가출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부모님은 자식의 가출 얘길 하면서도 덤덤하기만 하다. 릴리는 로이에게 수차례 전화하고 메시지를 남기지만 그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평소 아빠와 사이가 안 좋았던 동생이 또 싸우고 집을 나간 건가 싶어 닦달하지만, 차갑게 응수하는 아빠에게 절망한다. 급기야 릴리는 음식을 거부하고 학교에서 쓰러진다. 병원에 입원하지만, 로이에 대한 걱정 때문에 릴리의 상태는 나빠져 간다. 아빠는 로이에게 온 편지를 보이며 릴리에게 정상적으로 살 것을 부탁한다. 그의 편지엔 아빠에 대한 적개심이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욕설로 적혀있다. 음악 하는 로이를 못마땅해하는 아빠와 동생의 불화에 익숙한 릴리는 종종 그의 편지를 받으며 기다리지만, 편지만 올뿐 로이는 감감무소식이다.


아빠와 로이의 편지에 대해 얘기하는 릴리


  무딘 사람이라도 이쯤 되면 눈치를 챌 수밖에 없다. 로이는 이 세상에 없다. 릴리가 스페인에 있는 동안 등반 사고로 숨졌다. 부부는 유난히 쌍둥이 동생과 사이가 좋았던 남은 아이를 위해, 다른 아이의 죽음을 이런 식으로 숨긴다. 딸이 의심하고 병까지 얻자 거짓 편지까지 써가며 딸을 살려보려 애쓴다. 참 서글프고 안타까운 몸부림이다. 그렇게 해서 언제까지 딸을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지.


로이때문에 병까지 난 릴리


  집안의 연장자에게 자손의 죽음을 숨기는 일은 더러 있다. 충격으로 돌아가실까 봐 하는 미봉책이지만, 노인의 남은 수명이 그리 길지 않기에 거짓말을 오래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손들의 암묵적인 합의가 전제된 일이다. 딸을 사랑하는 부모는 한 아이의 죽음에 다른 아이마저 잃을까 두려워 거짓말을 한다. 부모가 왜 그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는지는 충분히 보인다. 릴리는 로이의 소식을 기다리다 음식을 거부하고 쓰러지기까지 한다. 아빠는 딸의 의심을 피하려, 아들이 자신에게 할 법한 가장 험한 욕설과 적개심을 편지에 적나라하게 담는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딸을 붙잡으려는 부성은 가상하지만, 살짝 소름이 돋는 건 어쩔 수 없다. 만일 내가 릴리였다면 그런 편지를 써가며 나를 속인 아버지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 같다. 사랑해서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한 일 치고는 너무 대책 없고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든다.


릴리와 남자친구 토마스


  각별한 쌍둥이 남매를 죽음이 갈라놓은 것은, 부모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형제를 잃은 슬픔보다 자식을 잃은 슬픔이 더 클 것이다. 갑자기 생때같은 가족을 잃는 것은 남은 가족이 평생 공유하고 극복해야 할 어쩔 수 없는 운명이지, 누가 누구를 위해 숨기고 감춰야 할 비밀이 될 수 없다. 보호하고 위한다고 한 거짓말의 진실이 나중에 드러날 때, 가장 크게 상처 받는 건 보호하고자 했던 당사자다. 그래서 이 영화 속 쌍둥이 남매의 아버지는 (나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분이 됐다. 영화를 다 본 지금, 처음부터 아들의 사고 소식을 딸에게 말하고 가족이 참척의 슬픔을 함께 나누고 극복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이 부모의 절절한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자식의 입장에서는 배신감마저 느낄 수 있는 일이다. 충격받고 회복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 해도, 나는 진실을 공유하는 게 서로를 존중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살아보니, 상대를 위한 하얀 거짓말이니 배려니 이런 게 얼마나 얄팍하고 본의 아니게 쉽게 깨지는지 알게 됐다. 다소 직설적이고 투박하더라도, 모든 걱정과 충격과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사이라면 (or 나눠야 하는 운명 공동체라면) 나누고 극복하든 떨쳐버리든 각자의 역량에 맞게 받아들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말은, 실은 걱정할 일이 많을 때 빈번하게 하게 된다. 내가 누군가에게 '걱정하지 말라'라고 하는 것은 진짜 걱정할 일이 없어서라기 보다, 당신이 걱정해봤자 해결되지도 않고 달라지지도 않으니 쓸데없는 감정 소모를 하지 말라는 말이다. 가뜩이나 심란한데 당신이 걱정하는 것까지 신경 쓰이게 하지 말라는 심정도 포함된 말이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소릴 들으면 은근 신경 쓰인다. 에너지 낭비인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 모든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지만, 걱정에 대해서는 상대의 말대로 듣고 싶다. 걱정하지 말라면 (내가 걱정해서 될 일도 아니니) 걱정하지 않고, 잘 있다고 하면 잘 있겠거니 하면서 말이다. 상대가 배려니 보호니 하는 명분으로 나를 속이지 않는다는 믿음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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