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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Dec 20. 2018

진짜 유령은 무대 뒤에 있다!

뮤지컬 <PHANTOM> 충무아트센터, 2018년

  내 눈으로 본 유령은 신비하고 아름다웠다. 실은 그는 유령이 아니다. 누구보다 인간적이고 가슴이 뜨거운 남자다. 얼굴에 흰 마스크를 쓰고 생의 비극을 노래하는 팬텀은 장중하지만 여리고, 슬프지만 강했다.  


  뮤지컬 『팬텀 PHANTOM』은 오래전부터 보고 싶었던 공연이었고, 나에게 임태경 배우는 어두컴컴한 지하가 아닌 하늘 높이 떠있는 아름다운 유령이었다. 『오페라의 유령』 설정을 빌려왔지만, 『팬텀』은 완전히 다른 극이다.


  오페라 극장 지하에 숨어 사는 에릭은 천상의 목소리를 지닌 크리스틴을 만나 노래를 가르쳐주며 사랑에 빠진다. 그녀의 애원으로 가면을 벗고 얼굴을 보여준 후 상처 받지만, 다시 사랑을 확인하며 죽는다. 유령으로 알려진 에릭의 과거사는, 그가 왜 마스크를 쓰고 사는 유령이 될 수밖에 없는지 알려준다. 가슴 아픈 비극의 시작과 끝은 나무랄 데 없이 비장하며 감동적이다. 음악, 연기, 무대 장치, 어느 것 하나 감탄을 자아내지 않는 것이 없고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는 주, 조연 가릴 것 없이 내가 본 어떤 공연보다도 촘촘하고 황홀했다. 심지어 연회장 테이블 위에서 움직이는 쥐까지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에릭 부모의 사랑 이야기와 그의 어린 시절 에피소드는 발레로 표현되는데, 인간의 몸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슬픈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옆자리 관객이 계속 훌쩍거리는 바람에 오히려 감정이 반감되긴 했지만, 1부의 발랄하고 화려한 전개에 비해 비극으로 치닫는 2부의 박진감 넘치는 비장함은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이 극은 휘몰아치는 전개가 많은 만큼, 무대 전환이 잦고 빠르다. 배경인 오페라 극장의 특성상, 2층으로 된 세트가 수시로 움직이며 전환된다. 팬텀이 머무는 지하까지 배우들은 쉴 새 없이 층 사이 계단을 오르내리고, 세트 곳곳을 분주하게 오간다. 무대를 한눈에 보는 관객이 눈 돌아가기 바쁠 만큼 다이내믹한 연출이지만, 배우들은 좀 힘들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장면은 그렇다 쳐도 배우들이 직접 세트에 매달리고 뛰어내리는 장면은 좀 아슬아슬해 보이기도 했다.


  팬텀이 밧줄을 타고 내려오는 장면이 두 번 있었다. 연습하며 합을 많이 맞춰봤을 테니 위험해 보이진 않았지만, 배우가 혹시 실수로 다치기라도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결정적으로 내 심장을 철렁하게 한 건, 2부에서 샹동 백작이 팬텀과 높은 다리 위에서 결투하는 장면이다. 족히 3층 높이는 될 거 같은 세트인데, 샹동은 팬텀의 일격에 다리에서 떨어져 두 팔로만 난간을 붙잡은 채 매달린다. 크리스틴의 절규에 가까운 부탁으로 팬텀이 그를 구해주긴 하지만, 그 사이 샹동을 연기하는 배우의 손이 미끄러지면 어쩌나 심장이 저려왔다. 다행히 팬텀은 연적인 샹동의 손을 잡아끌어올려주고 비장하게 최후를 맞는다. 보는 입장에선 다이내믹하고 박진감 넘치지만, 배우들의 위태스러운 몸짓을 보는 건 솔직히 편하지 않았다. 극적 효과를 위해서 필요한 장면이었겠지만, 저러다 만에 하나 실수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팬텀’ 임태경 배우


  공연장 밖으로 나오니 충무아트센터 내부 기둥마다 성명서가 붙어있다. 공연 전, 시간이 임박해서 들어갈 때는 보지 못했던 벽보다. 충무아트센터 무대기술부 노동자 10여 명이 여러 무대를 담당하며 수많은 공연을 치러왔는데, 그 과정에서 초과 근무를 하는 등 무리한 중노동이 불가피해졌고, 인원이 충원되지 않으면 무대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근로기준법까지 위반하며 일하는 노동자들은 경영자에게 충원을 요구했지만 이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무대기술부, 시설관리부 노동자들이 속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충무아트센터 분회 측이 문제를 제기하고 쟁의행위 중인 내용이 담겨 있다.


  성명서를 붙인 지 200일이 넘은 걸 보니, 이 문제는 이 아트센터의 고질적인 문제인 듯싶다. 나야 일개 관객이지만, 방금 심장을 조마조마하게 하는 배우들의 연기를 감탄과 걱정 어린 시선으로 본 입장에서, 무대의 안전을 운운하는 성명서를 못 본 척할 수가 없다. 내가 본 무대의 배우들은 목숨 걸고 공연을 한 건가 싶다. 정말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무대기술부 노동자들의 쟁의를 무시하고 이대로 공연을 진행하다 사고라도 나면 어쩔 건가 싶다.   


  새삼스럽지만, 공연 중 사고가 일어나면 배우들 뿐만 아니라 지켜본 관객들에게도 트라우마가 생길 수밖에 없다. 즐기려 온 공연이 안전불감증이 만연한 부실한 무대에서 올려지고 있다면, 더 이상 그곳에서 편하게 감상할 자신이 없다. 내가 찾지 않아도 여전히 그곳을 찾는 관객들과 공연하는 배우들과 일하는 스텝들의 안전은 누가 어떻게 보장할지, 답답하다. 화려하고 훌륭한 공연이라도 안전하게 무사히 막이 내릴 것이란 보장이 없으면 더는 찾고 싶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이 불안한 무대에서 공연하는 건 정말 못 보겠다. 그들을 찾아가서 말릴 수도 없고 각자 알아서 할 일이지만, 제발 목숨 걸고 공연하지는 말라고 하고 싶다.


  무대 뒤에서 꽤 오래 도사리고 있는 안전불감증이야 말로 뮤지컬 『팬텀』을 무대 밖의 비극으로 만들지도 모르는 '진짜 유령'이라는 생각이 든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지만, 진짜 유령은 무대 뒤에 있다. 안전문제는 결코 작고 디테일한 부분이 아니다. 안전이야말로 배우와 관객과 공연을 책임지고 지탱하는 공연장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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