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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Dec 24. 2018

환상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

책 <금수> 미야모토 테루, 바다출판사, 2016년

원래 이 책을 읽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을 읽고 싶었다. 책을 원작으로 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보기 전에 책부터 읽고 싶었다. 시립 도서관에서 검색했을 때 '대출 가능'이라고 해서 찾아보았는데 책꽂이엔  『환상의 빛』이 없었다. 말 그대로 환상의 빛처럼 책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작가의 다른 책들만 있었다. 『금수』는 작가가 『환상의 빛』을 모티브 삼아 쓴 소설이라고 한다. 대체 환상의 빛은 어떤 빛이기에 자신의 작품을 모티브 삼아 또 다른 작품을 쓰게 한 것인지, 사라지고 없는 그 책이 더욱 궁금하고 환상적으로 느껴진다.


책 제목 '금수(錦繡)'는 수를 놓은 직물이나 아름다운 시문을 뜻하기도 하고 단풍이나 꽃을 비유한 말이기도 하다. 30대 남녀가 주고받는 구구절절한 장문의 편지 열네 통이 소설의 전부다. 이혼한 지 10년이나 된 남녀가 환상처럼 재회한 순간을 부여잡고, 지난 시간을 되짚어본다. 아직까지 두 사람 사이에 남아있는 사랑(혹은 미련)때문인지, 장문의 글로 지난 세월을 반추하며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심정을 토로한다. 편지는 이 미완의 사랑이 환상에서 현실로 옮겨지며 미련을 떨친 남녀가 사랑을 놓는 과정을 냉정하지만 아름답게 보여준다.


작가 미야모토 테루


단풍 절정기인 늦가을에 아키와 아리마는 우연히 관광지 케이블카에서 재회한다. 이혼한 지 꼭 10년 만이다. 아키는 여덟 살 난 장애가 있는 아들과 함께였고, 아리마는 초췌한 몰골이었다. 두 사람의 섬광 같은 재회는 짧지만 강렬하다.


10년 전, 아리마는 클럽 호스티스 세오 유카코와 교토의 한 여관에서 동반자살을 시도해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유카코는 잠든 아리마의 목을 칼로 찌르고 자신의 목도 찔러 자살했지만, 아리마는 목숨을 건진다. 아리마는 죽을 마음이 없었고, 유카코가 왜 자신의 목을 찔렀는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 그 일로 유복한 집안의 딸인 아내 아키와 서둘러 이혼한다. 장인어른 회사의 일자리도 당연히 잃는다. 그 후 각자 보낸 10년은 편지에 고스란히 담긴다. 아키는 그때 물어보지 못했던 것을 전남편에게 묻는다. 행복한 신혼이었는데 왜 유카코와 불륜을 했는지, 그녀는 어떤 여자였는지, (같이 죽을 만큼)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했었는지.


아리마는 이혼하며 실업자가 된 후 나락에 떨어진 삶의 여정을 고스란히 편지에 밝힌다. 손대는 사업은 다 안됐고, 지금은 별 애정 없는 여자에게 얹혀 산다. 동반 자살을 시도한 유카코는 그의 중학교 동창이었다. 어린 시절, 그녀를 좋아하긴 했지만 결혼 후 불륜관계가 된 건 우연이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는 사랑의 미련을 떨치고 환상이 현실이 되는 가슴 시린 냉정한 과정이다. 아키는 선천성 뇌성마비인 아들을 낳은 업보를 전남편 때문이라며 원망하기도 한다. 그때 아리마가 불륜을 안 했으면, 동반 자살 사건이 안 일어났으면, 이혼을 안 했으면 이런 아들을 낳을 리 없다며 가슴을 친 적도 있다고 밝힌다. 아리마는 장인어른의 사업체를 물려받아 탄탄하게 보장된 인생을 제 발로 걷어찬 업보로 비루하고 험난한 삶을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소회 한다. 그는 동반 자살 사건 때 수술실에 누워있는 자신을 보는 유체이탈을 경험했으며, 그 이후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고 적는다. 아키 역시 충격적인 사건 이후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인생관을 갖게 된다. 그녀는 애정 없는 남자와 재혼 후, 남편의 불륜과 혼외자 마저 방관하며 오로지 장애가 있는 아들 양육에만 헌신한다. 헤어진 후 각자 같은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끊어질 뻔한 이 편지를 조금 더 이어준다. 그들은 편지를 통해 알지 못했던 시간을 들여다보며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나이를 먹으며 각자 생의 업보를 헤쳐나간 두 남녀는 10년 전보다 성숙하고 지혜로운 면모를 보인다. 평온한 결혼생활을 했더라면 알지 못했을 생의 비애도 알게 되고, 삶과 죽음의 불가해한 우연도 받아들인다. 풀리지 않았던 과거의 비밀과 의문을 허심탄회하게 주고받은 글은, 이들이 재결합 따위는 꿈꾸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엿보게 한다.


이 소설은, 아니 이 편지들은 참 서글프고 쓸쓸하다. 격정적인 어투의 원망과 묘사도 간혹 있지만, 전반적인 느낌은 차가운 빛처럼 서늘하고 시리다. 이토록 많은 말을 하고 싶어서 그동안 어떻게 참았을까 싶을 정도로, 둘 다 많은 사연을 전하지만 글자들은 예의 바르고 감정은 가라앉아 있다. 이렇게 쓸쓸한 사랑도 있을 수 있구나 싶다.


옮긴이의 말처럼 사랑은 환상이고, 모르는 게 많아야 환상은 유지된다. 현실이 개입하면 환상은 힘을 잃고 사랑은 희미해진다. 아키와 아리마는 이혼 후 10년 동안, 서로에 대한 사랑을 간직한 채 살았다. 미련이라 할 수도 있다. 이들은 서로를 환상 속에 둔 채, 그 너머를 궁금해하지만 깨뜨리지 못할 금기처럼 남겨두고 살았다. 두 사람이 편지를 통해 서로를 알고 이해하는 과정은 사랑을 잃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특별했던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되고, 충격적인 사건은 지나간 먼지 냄새를 풍긴다. 모든 걸 알고, 받아들이고, 이해한 후에 이들은 자신의 처지를 새삼스럽게 바라본다. 환상이 사라진 자리엔 냉정한 현실만 입을 벌리고 있다.


아키와 아리마의 시간은 차가운 현실을 딛고 뜨겁게 미래로 달려갈 것이다. 이들은 이제 사랑의 환상을 믿지 않지만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고 여기는 인생관은 더 이상 비관적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키라면, 혹은 아리마라면 미련을 떨친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시는 뒤돌아 보지 않을 것이다. 환상을 밀어낸  냉정한 현실이 삶을 더 단단하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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