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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Dec 28. 2018

민태구의 퍼포먼스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영화 <협상> 2018년

재밌었지만 뜬금없기도 했다. 배우들의 연기에 몰입했고, 감정적으로 동화된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뒷맛은 역시 개운하지 않다. 흠집 없는 연기력과 아우라를 가진 배우들이라서 더 안타까웠는지도 모른다. 보는 내내, 내 이성과 '협상'되지 않는 영화 「협상」은 약간의 배신감과 감정적 동요를 동시에 주는, 내겐 이율배반적인 영화로 남게 됐다.        



인질범 민태구


냉철한 듯 하지만 가슴이 뜨거워(?) 아슬아슬한, 서울지방경찰청 위기협상팀 하채윤 경위(손예진)는 국제 범죄조직의 무기 밀매업자 민태구(현빈)의 지목을 받고 협상 테이블에 앉는다. 인질범이 협상가를 지목하는 게 가능한가? 여기서부터 조금 어색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민태구가 그녀를 지목한 이유는 분명히 있고, 그것은 나중에 밝혀진다.


서울지방경찰청 위기협상팀 하채윤 경위


모니터를 통해 하 경위를 대면한 민태구는 협상가의 외모 드립부터 치며 기세를 장악하려 한다. 말 그대로 '장악하려 할'뿐, 실제로 장악한 듯 보이진 않는다. 협상가가 젊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소개팅 운운하는 것은 좀 뜬금없다.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하 경위에게 민태구는 인질로 잡은 하 경위의 상사, 경찰 정준구를 눈앞에서 사살하며 이 게임의 본격적인 쇼케이스를 연다. 국방부와 경찰청 공조 수사팀이 꾸린 작전 지휘실엔 이미 국정원 인사들과 청와대 국가안보실 비서관까지 나와있다. 뭔가 거대하고, 굉장히 구리고, 위험한 케이스라는 느낌이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작전 지휘실


민태구의 입담과 개인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냉정한 협상가를 자처하는 하 경위는 민태구가 원하는 걸 알아내고 싶어 하지만 그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대신 그는 자기가 왜 이렇게 성질이 뻗쳐서 이 짓을 하는지 순서대로, 나름 시간 안배까지 해가며 까발린다. 하 경위는 인질범의 유일한 대화창구인 자신에게까지 감추며 청와대와 국정원이 은폐하려는 게 뭔지 파고든다.


인질극의 목적을 쉽게 밝히지 않는 범인


냉정해야 할 협상가는 종종 이성을 잃고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인질범 민태구에게 동화된 듯한 감정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그녀가 인질들의 안전을 우선시하며 민태구의 생포를 주장하는 건 일면 타당성이 있다. 그가 알고 있고 밝히고자 하는 청와대와 국방부와 비리 기업의 커넥션은 중대한 사안이다. 이 모든 걸 증언할 적임자를 죽이지 않고 체포하는 건 경찰의 임무다. 하지만 하 경위가, 이 지리멸렬한 인질극을 끝내고 개인적 원한을 직접 처단하기 위해 움직인 민태구를 쫓아가 죽지 말라고 애원하는 모양새는 좀 낯 뜨겁다. "민태구, 그 목숨 잠깐 나한테 맡겨!"라니. "이깟 쓰레기 같은 목숨 맡아서 뭐하려고." 화답하는 민태구의 말이 더 오그라든다. 민태구는 자기 말대로 쓰레기다. 그가 아무리 현빈처럼 훈훈하게 생겼어도 사람들을 죽이고 무기를 밀매한 나쁜 놈이다. 실제 협상가가 인질범에게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긴박한 상황에서 하 경위가 민태구의 목숨을 사수하기 위해 시도한 짧은 대화는 (개인적으로)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민간인 인질들로 경찰을 위협하는 민태구


쓰레기 민태구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정의의 사도로 돌변한다. 유현주의 죽음에 대한 개인적 원한에서 시작한 인질극이, 우리나라 고위층의 비리를 드러내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다. (국적도 다른) 그가 언제부터 그렇게 대한민국을 걱정했다고 (결과적으로) 비리 척결에 헌신하는 모습은 약간 어이없다. 유현주를 (그렇게 죽을 게 뻔한) 호랑이 굴에 밀어 넣고, 그녀의 죽음에 빡쳐서 이 죽음을 조장하고 단순 강도 사건으로 덮은 윗선을 굴비처럼 엮어 수사하라고 요구하는 건, 이해는 가지만 뻔뻔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저렇게 당당하게 요구할 타당성을 지녔으면, 증거를 수사기관에 직접 투척하지 왜 어렵게 인질극까지 벌이며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하는 걸까 싶다. 나인 일렉트릭스 사옥의 별실에 모여 인질극을 관망하는 (비리와 협잡의 주범인) 윗대가리들을 찾아갈 기동력이 있으면 애초에 인질극 따위의 퍼포먼스는 집어치우고 직접 처단하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굳이 하채윤의 (실패한 지난 협상에 대한 직업적) 양심을 후벼파며 협상을 안 해도 민태구는 자신이 쓴 시나리오의 최악의 결말을 실행했을 것이다.


협잡과 비리 커넥션을 밝히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하경위


매력적인(?) 인질범 민태구


아쉬운 점이 있긴 해도, 이 영화는 배우들의 쫀쫀한 연기 덕에 지루하진 않다. 악과 그 악의 대척점에 도사리고 있는 더 거대한 악을 보여주는 이야기는, 너무 자주 봐서 기시감마저 느껴진다. 누가누가 더 악한가, 그 악마들의 분쟁에 누가 희생되는가는 조금씩 달라도 변하지 않은 패턴처럼 영화에서 자주 반복된다. 개탄스럽지만 지겹고 한숨이 나온다. 뉴스에 나올 음모와 사건이 매력적인 배우들에 의해 가상의 리얼리티로 반짝했다 사라지는 건가 싶기도 하다. 차라리 인질범에게 동화되는 스톡홀름 증후군에라도 빠지면 어떨까. 그런 얄팍한 도피를 유도하기 위해, 이 영화는 어이없는 퍼포먼스를 하는 민태구를 그렇게 훈훈한 배우에게 맡긴 건 아닐까? 모종의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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