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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an 01. 2019

부부가 평생 지치지 않고 같이 놀기 위해서는

영화 <집에 돌아오면, 언제나 아내가 죽은 척을 하고 있다>  2018

부부란 무엇일까. 결혼을 하지 않은 나에겐 영원히 알 수 없는 관계가 '부부'다.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다. 내 주변의 부부들을 보면, 그 속내를 다 알 순 없지만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물론 난 인간이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행복은 인간이 만들어낸 주관적인 관념이고, 반드시 행복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살 가치가 없다고 절망하는 것 자체가 욕심이다. 행복 자체가 순간적인 기쁨이나 만족감의 절정일 때가 많은데, 그런 감정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로또에 20억이 당첨되어도 평생 들뜨고 행복한 감정으로 사는 건 불가능하다. 짜릿한 기쁨이 여러 번 반복될 순 있지만, 그조차 순간적 감정의 반복이지 연속은 아니다. 20억이 하늘에서 떨어졌어도, 심하게 배탈이 나거나 뜨거운 물에 손을 데었다면 순간적일지라도 오로지 그 고통 속에 사로잡혀 있을 수밖에 없다. 사전적 정의대로, 행복이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상태라면 좀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감정이지만, 인간은 그런 평온한 평정심을 갖게 되면 행복을 자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이 행복해도 행복한 줄 모르는 것이다. 차라리 많이 불편하고 불행하지 않으면, 내가 지금 행복하구나~ 하고 인정하는 게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퇴근하고 집에 온 준은 거실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아내 치에(에이쿠라 나나)때문에 혼비백산한다. 경찰에 신고하기 직전에 눈을 뜬 치에는 입가에 묻은 케첩을 빨아먹으며 씩 웃는다. 그날부터 매일, 준이 퇴근해오면 치에는 각종 기발한 방식으로 죽어있다. 아니 죽은 척하고 있다.



살짝 맛이 간 것 같은 아내를 보며 남편은 고민에 휩싸인다. 저 여자가 도대체 왜 저럴까. 보통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남편은 따져 묻거나 다그칠 것이다. 대체 뭣 때문에 이러는 것이냐고. 그러나 이 일본인 남편은 직장 동료에게 고심을 털어놓긴 해도, 아내에겐 속시원이 묻지도 못한다. 참 답답하다. 부부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닌데, 두 사람은 왜 서로의 속마음을 터놓고 말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내가 그런 행동을 하는 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남편은 아내의 퍼포먼스가 못마땅하고 지치지만 강력하게 제지하지 못한다.



치에는 어릴 때 어머니를 잃고 홀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고, 남편에게도 자기보다 먼저 죽지 말라고 말한다. 준은 한 번 결혼에 실패하고 치에와 재혼했다. 그래서 그런지 세 번째 결혼기념일에 이대로 계속 살 것인지 아닌지 아내의 결정대로 하겠다고 내심 작정하고 있다. 솔직히 좀 못난 남자란 생각이 든다. 그건 아내를 존중하는 게 아니라, 결혼이라는 인생의 중대한 과정을 아내의 처분대로 하겠다는 회피로 보인다. 나의 편견일지 모르겠지만, 일본인 특유의 예의와 소심함은 이 부부를 원만하게 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벽을 만들기도 한다.  



평온하면서도 맹숭맹숭한 이 부부는 예의를 갖춰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는 듯 하지만, 남편은 언제든 네가 원하면 헤어질 수도 있다는 전제 하에 산다. 아내 역시 기이한 퍼포먼스를 하며 남편에게 보여주고 싶은 진심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치에는 밝고 천성이 착하다. 이웃에게 잘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도 헤아릴 줄 안다. 그래서 과한 장난을 쳐도 밉지 않다. 하지만 매일 그로테스크한 장난에 사로잡힌 이 키덜트와 같이 살고 싶진 않다. 준 역시 배려심 많고, 소심하지만 좋은 남자다. 그래도 이런 남자와 한 이불 덮고 살려면 많은 인내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말로 하거나 한방에 터뜨리면 간단할 것을, 이 부부는 서로의 속내를 감춰둔 채 눈치만 본다. 내 눈엔 그렇게 보인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서 서로에 대한 마음을 가까스로 드러낸다. 준이 회사 동료 부부 앞에서 은연중 말한 속내처럼, 이 부부의 사랑은 일상적이면서도 은근하다. 음식의 반을 정확히 나누긴 힘들지만 반이 되게끔 노력하면 되는 것이고, 맥주 거품이 사그라들면 다시 따르면 되는 것이다. 부부관계를 빗댄 이 말은, 좀 뜬금없고 그다지 감동적(?)이진 않지만, 소박하고 진심 어린 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부부가 서로의 인생을 정확히 반씩 공유하고 침해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면, 각자의 인생이 자유롭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그 여유만큼 내 옆의 상대에게 쏟는 에너지가 늘어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내가 혹은 상대방이 더 희생하고 애쓰는 관계는 쉽게 깨질 수밖에 없다. 열정은 3년을 못 버티고 사랑은 그보다 더 짧을 수 있다.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노력 없인 유지되지 않는 관계라는 얘기다. 세상 대부분의 부부는 짧은 열정 뒤에 평생 뒤따르는 노력에 치어 산다.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해야 하고, 강요받고 종용당하는 게 노력이고 인내다. 그것 자체가 나쁜 건 아니지만, 그럴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대안이 별로 없는 선택지가 문제다. 사그라진 열정 뒤에 드러는 서로의 민낯을 이해하고 감싸며 살던가, 내가 몰랐던 본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헤어지던가. 현실적으로 그 중간 어디쯤에서 애매하게 사는 부부가 가장 많을 것이다.



결혼생활의 지속 여부를 아내에게 떠넘기려는 준의 소심함과 치에의 이상한 장난기는 그들이 드러내는 민낯이다. 이 부부는 서로의 낯선 얼굴을 대면한 후, 서로를 깊게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물론 쉽지 않고, 앞으로 드러날 또 다른 얼굴은 어떤 모습일지 이들은 모른다. 부부는 평생 가면을 벗은 서로의 모습에 자신을 비춰보는 그림자놀이를 하는 파트너가 아닐까. 서로가 아니면 이 끔찍하고 지독한 민낯을 누구에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종종 내 민낯을 들켜 어느 정도 내성이 생긴 사람 앞에서 가면을 벗는 게 덜 민망하지 않을까. 보면 볼수록 상대가 나를 놀라게 한다면, 그 또한 결혼 생활의 묘미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행복한 결혼 생활은 요원한 꿈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꼭 행복해야만 살수 있는 게 아니듯, 결혼도 꼭 이상적이어야만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파렴치한 상대를 극복하고 감싸안는 과정에서 내 자신이 성숙해지고 인격이 고양되는 것을 느낄 수도 있다. 다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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